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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경종지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의주까지 몽진하는 데 참여하였다. 1597년(선조 30) 임실의 수령으로 재직 중, 이 고을이 새로 병화를 겪어 흩어진 백성들을 소집하고 창고 곡식을 수습하는 일을 결코 예사 사람에게 위임할 수 없는데, 수령된 자의 사람됨이 용렬하여 탕패한 고을을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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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흙도 만져보고 고구마도 캐보면서 아이들이 쉽게 자연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본다. 아빠의 어리숙한 삽질과 아이들의 호미질로 뿌리에 달려있는 고구마를 캐보며 수확의 기쁨을 가족과 함께 한다. 수확한 고구마는 직접 장작불을 지피고 가마솥에 쪄서도 먹고 숯불에 구워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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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수원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사후인 1823년(순조 32) 예조에서 각 식년(式年)에 서울과 외방에서 충(忠)·효(孝)·열(烈)에 대해 장계(狀啓)로 의정부에 보고한 것을 등급을 나누어 시행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서울에 사는 고(故) 첨지 최상유, 개성부의 고(故) 사인(士人)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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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동안 정성으로 가꾼 농작물을 도시민과 농민이 함께 거두면서 풍성한 수확의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체험의 장이다. 또한 직접 수확한 과실 및 농작물을 집으로 가져가는 기쁨도 만끽할 수 있다. 달콤한 과일 향내가 황홀한 과수원에서 탐스러운 복숭아와 배가 열릴 때까지 열매를 솎아주고, 다듬어주고, 봉지를 씌워주며 정성을 다해 키운 농부의 뿌듯한 마음을 잠시나마 느끼면서 토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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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현령을 역임한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이옥(爾玉), 호는 경호(耕湖). 김새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으며, 슬퍼함이 형언할 수 없었다. 그의 효행에 하늘도 감복하였다. 이를 테면, 제사를 지낼 음식이 다 떨어지면 꿩이 부엌으로 날아들었고, 사슴 한 마리는 묘 옆을 지키며 사람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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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김호(金灝)이다. 수원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였고, 1696년(숙종 22)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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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거주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여(錫汝), 호는 연농(硏農)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여 용인현 수여 남동에서 거주하였다.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소홀함이 없이 항상 곁에서 모시고 입에 맞는 음식과 계절에 어울리는 옷을 준비하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여 용인현에서 이름난 효자였다. 1859년(철종 10) 사마시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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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수원부 양지현(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살던 선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1806년(순조 6) 각 지역 유생의 건의에 따라 예조에서 왕에게 효자를 보고하였는데, 이때 증직(贈職)의 특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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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일찍이 용인 탁영봉(濯纓峰)의 한림대에서 김구(金龜) 등과 학문을 하였다. 그에 따라 봉우리도 김일손의 호를 따 탁영봉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다. 1486년(성종 17)에 생원이 되었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가 곧 정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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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庵). 조부는 김려(金濾), 아버지는 형조참의 김언침(金彦沈)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檢閱)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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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수원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 거주하였다. 1759년(영조 35)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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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숙(平叔). 1735년(영조 11)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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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중(子中), 호는 낙애(樂涯). 1691년(숙종 17)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갑과(甲科) 제2위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지사(知事)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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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휘(德輝), 호는 의졸(宜拙). 부친은 남식(南烒)[1589~1650]이고, 동생은 남이성(南二星)[1625~1683], 아들은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다. 평소에는 어버이를 공경하는 데 힘을 썼고, 관직에 종사할 때는 절용(節用)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재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656년(효종 7) 내시교관(內侍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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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메치기는 떡시루를 올려놓은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펴 밥을 한 다음, 옛날 떡판과 떡메를 이용하여 떡을 쳐보며 직접 손으로 인절미를 만들어 먹어보는 체험행사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찹쌀밥을 떡판 위에 올려놓고 떡메로 힘차게 내리쳐서 쫄깃쫄깃한 떡을 만든다. 떡메가 무거워 힘들지만 고소한 콩고물을 묻혀 접시로 썬 다음에 따끈따끈한 인절미를 한 입에 쏘옥 넣으면 힘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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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허환(虛患)으로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온갖 정성을 다해 돌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에 한 의원이 고기를 먹어야 나을 병이라고 조언하니, 추운 겨울에 폭설을 무릅쓰고 개울에 나가 얼음을 깨고 물 속에서 가물치 7마리를 잡아다 탕약을 해드려 낫게 하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였을 때는 백방으로 영약을 구하였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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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경노(景魯). 할아버지는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낸 평숙(平叔) 목천수(睦天壽)이고, 아버지는 공집(公集) 목회경(睦會敬)이다. 1747년(영조 2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61년(영조 37)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사직서령(社稷署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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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감자는 무슨 색일까? 정말, 일곱 색깔 무지개색일까? 무지개감자는 어떤 모양일까? 무지개 감자는 어떻게 수확할까?” 직접 농작물 밭에 들어가서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작물들을 직접 만져보고 수확하여 집으로 가져가는 체험프로그램으로 농촌의 진정한 재미인 수확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시간이다. 줄기를 뽑을 때마다 굵고 동그란 감자와 아직 덜 익은 작고 귀여운 감자들이 뿌리에 알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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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이쪽으로 몰아, 그렇지 그렇지, 우와~!”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온가족이 함께 와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마을회관 앞 개울가에서 민물고기를 직접 손으로 만지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행사이다. 잡은 물고기는 그 자리에서 추어탕으로 끓여먹게 하여 추억거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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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 지역의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생활 풍속. 민속은 한 문화권 내에서 다수가 향유하고 있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문화로 민중들이 자연적, 역사적, 사회적 환경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지혜와 믿음으로 엮어낸 생활양식이다. 전통 시대의 마을조직인 동계(洞契)·촌계(村契)에서는 주로 크게 세 가지 기능을 하였다. 첫째, 마을 공동의 수호신을 제사하는 사신공동체(祀神共同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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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에 거주한 귀화인. 북쪽 오랑캐 출신으로 광해군 초에 조선에 귀화하여 용인의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 큰길가에 7~8년 거주하였는데, 그곳은 크고 작은 행인들이 밤낮으로 오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하 16~18명을 거느리고 밤에 산행을 한다고 칭하면서 무리를 지어 행인이나 짐을 쫓아가 약탈을 일삼았다. 또한 읍내의 원전(元田)을 빼앗아 경작하거나 무성하게 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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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1771년(영조 47) 과거에 급제하였다. 통덕랑(通德郞)에 올랐으나 모친께서 병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병을 돌보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약재를 구하여 탕약을 해드렸다. 병세가 위독해진 뒤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니 수명이 조금 연장되었다. 돌아가신 후에는 졸곡(卒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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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갑과 집게 그리고 밤을 담을 자루를 가지고 양달농원 뒷산에 올라 바닥에 널려 있는 밤을 자루 가득 주워 담는다. 밤은 어떻게 열리고 또 어떻게 따야 하는지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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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와 참새가 놀고 있는 황금들판에서 가족과 함께 서투른 낫질로 벼를 베어보는 체험을 통해서 자연을 배우고 벼 수확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농업의 중요성과 농민의 생활에 동참해 본다. 땀 흘리며 벼 베기 체험을 마치고 나서 논두렁에 걸터앉아 먹는 가마솥 들밥의 맛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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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면 학일마을에 들어서면 마을회관에 메주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이 메주는 도시와 농촌의 자매결연 행사로 만들어진 결실로 마을에서는 주민들의 넉넉한 인심과 마음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마을을 찾아오면 따사로운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체험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봄이 되면 학일마을의 산과 들에는 나물들이 가득하다. 언덕에 파릇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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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한 해를 단위로 일정한 시기에 관습적·주기적·전승적·반복적·의례적으로 거행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행위. 세시풍속은 세시(歲時)에 따라 나타나는 풍속(風俗)으로 자연적인 특성이 인문·자연 환경의 배경과 함께 관습적으로 생성되어 전해 내려오는 생활 양식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문화의 한 요소이다. ‘세(歲)’는 한 해를, ‘시(時)’는 춘하추동 4계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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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송명천은 양지현(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주변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경기관찰사가 조정에 아뢰어 교생(校生)으로 있을 때인 1822년(순조 22) 11월 5일에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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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농촌에서는 농사일이 바빠지는 농번기가 시작된다. 볍씨도 파종하고 고추모종도 하고, 고구마도 심고, 감자도 심고, 콩도 심고, 열무씨도 파종하는 등 각종 씨앗을 뿌리고 옮겨 심는다. ① 종자의 소독과 선별하기 우선 파종하기 전에 건실한 종자부터 가려낸다. 통통하고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 하여 25도정도의 온수에 4~5시간 정도 담가 두었다가 그 물로 씻어 낸다. ② 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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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順興). 아버지는 함흥군수를 지낸 안익(安翼)이다. 용인에서 출생하여 승사랑(承仕郞)을 지냈고,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릴 적 과천(果川)에 살았을 때, 부친이 병으로 고생하자 몸소 병구완에 전념하였다.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한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드렸고, 산천에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상(喪)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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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문약(文若). 안희묵(安羲黙)[1795~1881]은 수원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였다. 안희묵은 어려서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에 열중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들게 하는 효행을 보였으며, 상을 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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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여중(汝中). 고려 후기의 성리학자 안향(安珦)의 21세손이다. 안희중(安禧重)[1728~1800]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743년(영조 19) 6월 그믐날 밤 폭우가 쏟아져 사당이 무너지려 하였으나 부모님은 모두 병석에 누워 있었다. 당시 16세였던 안희중은 급히 사당으로 뛰어 들어가 대들보를 붙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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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공소(孔昭). 할아버지는 어진혁(魚震赫)이고 아버지는 어사량(魚史良)이다. 어운해(魚運海)[1750~?]는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효도를 다하였다. 아버지 어사량이 등창으로 병석에 있을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낫게 하였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한겨울에 대추가 먹고 싶다고 하자 눈 속에서 대추를 구해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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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경백(驚百).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의 후손으로, 아들은 어사량(魚史良), 손자는 어운해(魚運海)이다. 어진혁(魚震赫)[1684~?]은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하자 목욕재계하고 냇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3일 동안 기도를 하였더니 잉어가 스스로 뛰어올라 왔다. 그 잉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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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오달천(吳達天)[1598~1648]은 조선 중기 선조 대부터 인조 대까지 활약한 문신으로 한성(漢城) 숭교방(崇敎坊)[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해주(海州). 할아버지는 오희문(吳希文)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이다. 1620년(광해군 12)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벼슬길에 나아가 사산현역(四山縣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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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는 그야말로 잡초와의 전쟁이야! 뽑고 또 뽑아도 끝이 없거든, 그런데 여기는 오리들이 농사를 짓고 있어.” 학일마을에서는 2000년 친환경농업지구로 선정이 되어 지금까지 친환경 쌀을 생산하기 위하여 오리를 이용한 유기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 오리농법으로 생산된 청둥오리쌀은 원삼농협과의 공동브랜드인 "파란하늘 맑은햇쌀" 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오리농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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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방사는 농약 없이 농사를 짓는 논에 한 해 농사가 잘되도록 새끼오리를 직접 놓아주는 체험행사이다. 도시의 소비자와 농민이 함께 짓는 농사로 유기농업에 필요한 오리를 도시민들이 모내기를 마친 후 마을에 방문하여 마을 주민들과 함께 새끼오리를 논에 방사함으로써 농사의 시작을 농민과 함께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환경친화적인 농업에 대한 체험학습의 장을 마련하여 쌀에 대한 소중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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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 전투에 참여한 의병.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광보(廣甫).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의 차남으로 태어나 큰집인 원수량의 양자로 갔다.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된 원균(元均)의 동생이다. 경기도 송탄시 도일동(현재 경기도 평택시 송탄동)에서 태어났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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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용인의 험천 전투에서 전사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兒名)은 경민(慶敏). 초명(初名)는 경징(慶徵). 자(字)는 군선(君善) , 호(號)는 남포(藍浦),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경선(李慶善)은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1632년(인조 10)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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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문신. 자는 경담(景膽). 1567년(선조 즉위년) 임금에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당한 사람들을 포증(褒贈)하기를 청하였으며, 그것이 허락되자 『기묘록(己卯錄)』에 기록되었다. 1589년(선조 22) 장성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을 떠나자 도보로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삼등현령(三登縣令)에 임명되었으며, 군사를 다스리는 일과 양곡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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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운(啓運). 아버지는 이기남(李起南)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이계복은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는 것을 지성으로 하여, 부모님이 병이 들면 항상 변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였으며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아버지가 학질에 걸렸을 때, 어떤 이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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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상여(相如). 아버지는 이백주(李白州)이다. 1651년(인조 20) 아버지 이백주가 시험관으로 있던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남달리 총명하고 시문(詩文)이 아름다우며 풍도(風度)가 있었다. 그러나 부친의 병간호로 마음을 졸이고, 부모상을 당하여 몸이 상하여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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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이질(而質).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에 책록된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이옥(李沃)이다.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이인기(李麟寄)이다. 아버지는 이명노(李明老)이고, 부인은 밀양박씨 박영신(朴榮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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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군수를 역임한 관리. 1898년 11월 19일 지금의 수지 지역인 지내면의 김병하가 탁지부에 과세 폐단을 시정해 달라고 요구하다 거부되자 1899년 6월 29일 김량장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군 청사에 들어가 수서기(首書記) 박희종을 끌어내자 박희종의 동생 박희순이 시위 농민들을 습격하여 7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1897년(고종 34) 12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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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문인. 본관은 전주(全州). 조선조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敬寧君)의 11대 손으로, 남편은 목천현감인 유한규(柳漢奎)이고, 아들 유희(柳僖)는 『언문지(諺文志)』를 저술한 한글학자이다. 충청도 청주(淸州) 서면(西面) 지동(池洞)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녀자의 솜씨를 익히고 옛 열녀를 마음으로 사모하여 이에 『소학(小學)』, 『가례(家禮)』, 『여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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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차옹(次翁), 호는 졸옹(拙翁). 할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이중손(李仲孫)이고, 아버지는 판관(判官)을 지낸 이희안(李希顔)이다. 이성동(李成童)은 조선 중기 연산군 대에 활약한 문신으로 기묘명현의 산사람이다. 1495년(연산군 1)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持平)·사간(司諫)·직제학(直提學)·대사간(大司諫)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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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사인(士人).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화보(和甫).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으로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석형(李石亨)의 손자이고, 별좌(別座)를 지낸 조계남(趙繼男)의 외손자이다. 아버지는 사예(司藝)를 지낸 이혼(李渾)이다. 첫째 부인은 문화류씨(文化柳氏)이고, 둘째 부인은 장연변씨(長淵邊氏)이다. 이순장은 음직(蔭職)을 받았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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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의이씨 용인 입향조. 이언념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 일대에 거주하는 전의이씨의 입향조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정이(靜而), 자호는 백석산인(白石散人)이다. 이언념은 선교랑(宣敎郞)의 벼슬을 지냈다. 1617년(광해군 10)에 충정공(忠貞公) 홍무적(洪茂績)과 더불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廢母)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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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호원(浩源), 호는 포곡(蒲谷). 아버지는 이숭의(李崇義)이다. 이용(李涌)은 조선 중기 선조 대부터 현종 대까지 활약한 무신이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대왕을 공주까지 호종(扈從)하였다. 그 공훈으로 의금부도사를 제수받았으며, 원종1등공신 영국공(寧國公)에 녹선되었다. 또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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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양지현감을 역임한 문신. 이용신은 1724년(경종 4) 7월 양지현(현재의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현감으로 부임하여 1728년(영조 4) 4월까지 역임하였다. 재임 기간에 아이들의 성과 이름을 초록(抄錄)해 두었다가 책(冊)을 만들었다. 그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렸다가 군액(軍額)에 충정(充定)하여 군영(軍營)에는 수효가 모자람이 없게 하고, 고을에서 백골(白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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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 자는 경원(景元). 6판서 집안으로 아버지는 예조판서 이삼현(李參鉉)이다. 1867년(고종 4)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1880년(고종 17) 성균관대사성에 등용된 뒤 이듬해 이조참의·사간원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883년(고종 20)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정사(正使) 민종묵(閔種黙)과 함께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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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이재학은 조선 후기 영조 대에서 순조 대까지 활약한 문신이다. 대사간으로 재임할 때는 “오늘날 허다한 하자와 폐단을 이루 거론할 수 없습니다만, 그 병든 근원을 찾으면 오로지 군신상하(君臣上下)가 실(實)이란 하나의 글자를 실행해나가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라고 임금께 당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중(聖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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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 자는 여고(汝皐). 조부는 인평부원군 이보혁(李普赫),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경호(李景祜)이다. 1757년(영조 33) 정시(庭試) 춘당대에서 장원 급제하였고, 사간원지평·홍문관교리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763년(영조 39) 암행어사로 호서 지방을 감찰하였다. 이어 홍문관교리로서 세자시강원필선·문학 등을 겸임하였고, 사헌부헌납·홍문관수찬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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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처사.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택경(擇卿), 호는 운계(雲溪).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의 벼슬을 지낸 이언념(李言恬)이다. 이정선은 광해군 시대의 어두운 세상을 당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 고요하게 지냈다. 병자년의 호란을 당하여 절의(節義)를 다할 때는 관(冠)을 쓰지 않고 머리를 빗지 않았으며 북향(北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산림에 은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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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무신. 이찬조는 조선 중기 선조 대부터 인조 대까지 활약한 무신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별천선전관(別薦宣傳官)으로 인조(仁祖)를 남한산성까지 호종(扈從)하였다. 이 후 의병을 이끌고 지금의 성남시 세곡동에 이르렀을 때 적군인 청군(淸軍)에게 포위되었다. 민진익(閔震益)과 함께 힘을 다해 싸워 여러 명의 적군을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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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재원(載元), 호는 허주(虛舟). 아버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시정(李時程)이다. 이천기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서 일찍부터 학문을 닦았고 예의범절에 밝았다. 1653년(인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별과로 급제하여 승지(承旨)·한림(翰林)·삼사이랑(三司吏郞)을 역임하였고, 벼슬은 감사(監司)에서 그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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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대이(大爾). 아버지는 효행으로서 감찰(監察)에 증직(贈職)된 이호정(李鎬貞)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응회(李應會)의 딸이다. 1882년(고종 19) 58세에 비로소 벼슬길에 들어가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1893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는 한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효성이 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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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우봉(牛峯). 아버지는 참의(參議) 이유겸(李有謙)이고, 동생은 의병 이령(李翎)이다. 이핵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집안이 모두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가고 자신은 의병에 입대하였으나, 혼자 남은 모친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모시고 있었다. 이듬해 광성진(廣城鎭)에 주둔하던 동생 이령과 함께 갑곶진(甲串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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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 자는 유야(悠也), 호는 백치(白痴). 아버지는 대사간 이사경(李士慶)이다. 1618년(광해군 10)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이 되어 시관(試官) 김륜(金崙)과 임건(林健) 등의 잘못을 탄핵하였다. 이어서 호조정랑·직강·사서를 거쳐 평양서윤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첨정(僉正)으로 있을 때 명나라 장수 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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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용인 출신의 장수 노인. 1435년(세종 17)에 세종은 각 도의 감사에게 나이가 100세에 이른 노인들에게 쌀 10석과 술, 고기를 주라고 교지를 내렸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448년(세종 30)에는 왕이 법에 따라 100세 이른 노인들을 위문하고 구제하는지 확인하여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정부개(鄭夫介)는 용인 지역에 살았던 최장수 노인이었다. 당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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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 세조를 보좌하며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麟趾)의 증손이다. 정우(鄭瑀)[1536~1599]는 조선 중기 중종 대부터 선조 대까지 활약한 문신으로 관위(官位)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좌승지겸경연관참찬관(左承旨兼經筵官參贊官)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상미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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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조변(趙汴)[1500~1582]은 조선 중기 연산군 대부터 선조 대까지 활약한 문신이다. 본래 학식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으나 천성이 매우 명석하였다. 소년시절부터 안처겸(安處謙)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다가 뒤에 그와 동서 사이가 되었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호연(浩然), 호는 금재(琴齋). 학자이며 대사헌을 지낸 조광조(趙光祖)가 족숙(族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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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조연(趙捐)[1374~1429]은 벼슬에 나간 뒤 파천된 일이 없었고 4대조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재화를 탐하지 않고 국정에 힘썼다. 문신이면서도 야인 정벌에 무공을 떨치기도 하였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정(汝靜), 초명은 조경(趙卿). 아버지는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이고, 어머니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친인 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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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민(景敏). 아버지는 조수린(趙壽麟)이며 조인은 여섯째 아들이다. 부인은 영덕정씨(盈德鄭氏)이다. 조인(趙訒)[1555~1631]은 조선 중기 명종 대부터 인조 대까지 활약하였다. 어려서부터 용모와 태도가 크고 위엄이 있어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벼슬하지 않은 일반인으로 의주까지 임금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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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반란인. 1623년(인조 원년)에 인조반정으로 우부승지에서 파직되어 제천에 유배되어 있던 유효립(柳孝立)은 사람들을 모아 광해군을 상왕(上王)으로 삼고,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도모하였다. 조헌립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출신으로 이 역모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거사 하루 전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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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말은 기흥구 지곡동 상동에 위치한 자연부락으로 이 마을에는 기묘명현 중의 한 분이신 음애 이자 선생의 사당을 모신 가묘(家廟)와 종택(宗宅)이던 구옥(舊屋)의 기와집이 생겨서 기와집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997년 용인시 향토유적 보존가옥으로 지정되었다가 그 후에 경기도 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었다. 중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월애동(月厓洞)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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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동(芝谷洞)은 기흥구의 상갈동에 속한 동(洞)의 하나이다. 기흥(器興)은 고려시대의 용구현(龍駒懸)과 조선시대의 용인현(龍仁懸)에 속해 있던 역참(驛站) 지역의 하나이다. 행정구역 개편 당시 지내면(枝內面)의 영통리(靈通里) 지역과 기곡면(器谷面) 일원을 합치고 구흥면과 내읍삼면 일부를 합친 지역으로서 기곡(器谷)에서의 첫 글자와 구흥(駒興)에서의 끝 글자를 합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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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형조판서 최조(崔肇)이다. 1452년(문종 2)에 형조도관좌랑을 거쳐 공조좌랑·이조참의·함경관찰사 겸 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원래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에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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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한성판윤 최사위(崔士威)이고, 아들은 이조참의와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한 최선민(崔善敏)이다.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후에 이조판서를 제수받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묘소는 원래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에 용인시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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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고버섯 종균접종과 버섯 따기 체험행사는 표고버섯을 배양할 참나무에 전기드릴로 손가락 굵기의 구멍을 뚫어서 그 곳에 표고버섯의 종균을 넣는 체험과 다 자란 버섯을 수확하는 체험행사로 이어진다. 종균의 접종은 대개 봄과 가을에 하고 버섯은 종균을 접종하여 18개월 정도 배양을 한 후에 채취를 하게 된다. 종균을 한 번 접종한 참나무는 보통 2년 반 정도 버섯을 수확한 후에 폐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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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충노(忠奴). 피무작금의 성(姓)은 피(皮), 이름은 무작금(蕪作今)이다. 진사 정시익(鄭時翼)의 종으로 죽산도호부 근삼면 외초동(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에서 살았다. 정시익이 여덟 살 무렵 피무작금은 목천(木川)에 있는 여동생 집에 심부름을 가 있었다. 이때 정시익의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모두 죽자, 이웃들은 병을 두려워하여 감히 돌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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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원삼면에 위치하고 있는 학일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원삼면의 문촌리 일부와 양지군 목악면 학일마을 지역을 통합하여 만든 마을이다. 마을에는 2007년 현재 50가구에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38가구에서 38대의 PC를 보유하고 있는 정보화마을이다. 학일마을은 현대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용인의 기타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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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마을[學日里]은 앞으로 장엄하게 솟아있는 구봉산과 서편에는 쌍령산, 북쪽으로는 문수산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학일마을은 본래 마을에 학(鶴)과 백로 등이 서식하여 학일(鶴日)이라고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 중의 한 분인 추담(秋潭) 오달제(吳達濟) 선생이 태어난 후에 학일(學日)이라고 하였다. 18세기 중엽의 『양지현읍지』나 1789년 간행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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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백창(伯昌). 아버지는 대사헌(大司憲) 한현모(韓顯謨)이다. 백창(伯昌) 한후유(韓後裕)[1713~1791]는 숙종 대부터 정조 대까지 활동하였으며, 1748년(영조 24) 35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1751년(영조 27)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제수 받은 후, 세손좌종사(世孫佐從史)·사복시주부(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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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공신. 본관은 양천(陽川). 아버지는 갈충효성병기익명영사공신(竭忠效誠炳幾翊命寧社功臣)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 받았던 허계(許契)이다.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은 전(前) 세마(洗馬) 허유(許유)·전(前) 좌랑(佐郞) 정심(鄭沁)·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 등과 내통하여 자기 아들과 추종자를 도성(都城)으로 잠입시켜 광해군을 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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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홍수득(洪守得)이다. 홍제(洪霽)[1553~1625]는 명종 대부터 인조 대까지 활동하였으며 무과에 급제한 후 오위낭청(五衛郎廳)을 거쳤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군관으로 수원 방어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중동에 있으며, 묘소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