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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무작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032
한자 皮蕪作今
영어음역 Pi Mujakgeum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광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충노(忠奴)
출신지 경기도 용인시
성별
생년 16세기 말
몰년 17세기 초
본관 미상

[정의]

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충노(忠奴).

[활동사항]

피무작금의 성(姓)은 피(皮), 이름은 무작금(蕪作今)이다. 진사 정시익(鄭時翼)의 종으로 죽산도호부 근삼면 외초동(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에서 살았다. 정시익이 여덟 살 무렵 피무작금은 목천(木川)에 있는 여동생 집에 심부름을 가 있었다. 이때 정시익의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모두 죽자, 이웃들은 병을 두려워하여 감히 돌보지 못하였고, 함께 살던 종들은 재산을 훔쳐 달아났다. 피무작금은 이 소식을 듣고 목천에서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여 염을 하고, 정성과 경의를 다하여 장례와 제례를 치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정시익을 업고 산골짜기에 숨어 목숨을 보전하게 하였으며, 글짓기와 글쓰기를 권하며 스승의 집까지 모셔 가서 공부를 하게 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곁에서 모시면서 권하였고, 들에서 김매기를 할 때는 일을 하며 글을 읽게 하였다. 만약 정시익이 공부를 게을리하면 옛 주인의 사당에 고하고 통곡을 하며 기둥에 매질하여 스스로 벌을 받았다.

이에 정시익 또한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진사에 합격할 수 있었고, 나이에 맞게 혼인도 할 수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잃어버린 농장도 찾아 그 가문을 보전한 것은 모두 피무작금이 충성스럽게 열심히 독려한 힘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조정에서 특별히 피무작금에게 정문을 하사하였다. 피무작금은 후손이 없었지만 상전들이 대대로 묘소를 보살피고 토지를 두어 죽은 날과 절일(節日)에 제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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