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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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羲黙 |
영어음역 | An Huimuk |
이칭/별칭 | 문약(文若)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광준 |
성격 |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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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
성별 | 남 |
생년 | 1795년(정조 19) |
몰년 | 1881년(고종 18) |
본관 | 순흥 |
대표관직 | 동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문약(文若). 안희묵(安羲黙)[1795~1881]은 수원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였다.
[활동사항]
안희묵은 어려서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에 열중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들게 하는 효행을 보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이 지극하였고 시묘를 정성으로 하였다. 일찍이 장지(葬地)를 구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호랑이를 만나는 위험을 당하기도 하였다. 탈상 후에도 한 달에 두 차례 성묘하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한 번은 먼 곳에 갔다가 부친의 기일(忌日)에 맞춰 돌아오는데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포기하였지만 안희묵은 강가에서 통곡하다가 마침내 물속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강을 건너 무사히 제사를 모셨다. 1864년(고종 1) 70세의 늦은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1873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881년 자손들을 불러 놓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고생하시며 보살펴 주신 은혜를 갚기 어려워 한을 펴지 못하였다(有父母 勞恩難報恨未伸之)”라는 글귀와 함께 ‘효우근검(孝友勤儉)’ 네 자를 써 주면서 그 뜻을 명심하고 가업을 바꾸지 말라 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