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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효자 박태영 박장석 부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E030301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박장석 씨를 처음 만난 것은 마수리의 대성(大姓)인 운봉박씨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신석 이장인 이유성 씨가 한문 공부도 많이 했고 보학에도 밝은 분이 박장석 씨라고 말하면서 그를 추천했다. 사실 마수리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운봉박씨의 유래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만들기 때문이다.

박장석 씨를 만나 운봉박씨가 고려 말에 시작되었다는 얘기도 듣고, 조선 초 높은 벼슬을 한 조상들이 있어 그 위상이 높아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리고 조선 숙종[1675~1720] 때 운봉박씨가 이곳 마수리 온수골에 자리를 잡아 약 10대에 걸쳐 세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상들이 온수골로 오게 된 경위도 알게 되었다.

박장석 씨는 마수리마제라는 동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 자신의 견해를 말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옛 마을들의 위치와 그 지명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히 군부대로 수용된 온수골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박장석 씨였다.

이야기가 점차 현대로 넘어오게 되었고, 20세기 마수리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박장석 씨와 이야기를 통해 마수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찾고자 하였다. 주제를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 마수리 농요를 지키는 사람들, 농사로 성공한 사람들, 마을을 이끄는 사람들, 자식 농사에 성공한 사람들, 효자와 효부, 문화유산이나 자료를 관리한 사람들로 정리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박장석 씨는 이 여섯 가지 항목 중 효자이면서 운봉박씨 자료를 잘 간직하고 관리한 사람에 속하였다. 그리고 2003년에 돌아가신 박장석 씨의 아버지 박태영 씨는 아들보다도 더 효자였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시묘 살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부모님 묘소에 문안드리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두 부자를 과거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박장석 씨의 아버지 박태영(朴泰榮)[1910~2003] 씨는 1910년 5월7일 온수골에서 아버지 박영래와 어머니 원주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태영 씨는 어려서 한문을 공부했다. 젊어서는 나라를 뺏긴 설움을 한탄하여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춘궁기에는 칡뿌리와 송진 등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일제에 협력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193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 앞에 묘막을 설치하고 3년 동안 시묘 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3년상을 마친 후에도 매일 새벽이면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불피풍우(不避風雨)하고 부모의 묘소에 문안 성묘하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실행했다” 고 한다. 그리고 밤에는 세수를 하고 나서는 의관 정제하고 부모의 묘소를 향해 배례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을 강요하였다. 이때 박태영 씨는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을 거부하였다 한다. 박씨를 모리다[森田]로 바꿀 것을 강요했으나 운봉(雲峰)까지는 양보할 수 있으나 모리다로는 할 수 없다고 버텼다. 자식들도 일본어를 가르치는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해서 집에서 한문교육만을 시켰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모임인 면민 단합대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한다. 이로 인해 구호양곡을 배급받지도 못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다 한다. 그러나 박태영 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해방이 될 때까지 절개를 지키며 고결하게 살았다 한다.

젊어서 부모를 잃은 박태영 씨는 세 아들에게도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을 가르쳤다. 또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떳떳한 삶을 살아갈 것을 주문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들과 손자들 모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충효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의 모범이 되고 있다. 박태영 씨는 진정한 효를 실천하고 나라사랑 애국애족 정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박태영 씨의 뜻을 기려 정부에서는 2001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이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박장석[1933~ ] 씨는 일제강점기 때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 대신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익힌 다음 동네에서 김인호 씨로부터 한문을 공부했다. 이때 배운 책이 『명심보감』, 『통감』,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이다. 그러다가 1950년 6·25전쟁이 나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1952년 이연희[1934~ ] 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1953년 휴전이 되기 직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는 제주도에 있는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제주도 해안 경비를 맡아 전선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았다. 곧 이어 휴전이 되었으나 바로 한라산 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위험한 일도 당했다고 한다. 박장석 씨는 1959년까지 6년간 군대생활을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군에서 배운 태권도 실력을 인정받아 원주에서 경찰이 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 순사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던 집안 형님들의 반대로 온수골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대 온수골은 아직 개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박장석 씨를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은 마을을 발전시켜보자는 일념으로 화전을 개간하고 길을 닦고 농사용 지하수를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때 박장석 씨는 5,000평의 땅을 개간할 수 있었고, 10마지기의 논을 구입하게 되었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마제로 이어지는 길을 넓혔고, 지하수를 파 가뭄에 대비했다. 1970년대에는 뽕나무를 재배해 양잠에 참여했다. 온수골 위의 마을을 상촌(桑村)이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 이름이 뽕나무에서 생겨난 것이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대골과 상촌에는 약 40호, 온수골에는 약 20호 정도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82년 율곡지구 사업에 의해 온수골 지역이 군부대에 수용되면서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용원리 내용으로 이주했으나 박장석 씨를 비롯한 4가구만이 마수리로 이사를 했다. 박장석 씨가 마수리 신석으로 온 까닭은 아버지인 박태영 씨가 고향인 마수리를 떠나지 말고 전통을 지키도록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박장석 씨는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효자인지라 신석으로 이사를 왔고 현재도 마수리 526번지에서 살고 있다. 박태영 씨도 효자였지만 박장석 씨도 효자여서 아버지 박태영 씨가 할아버지 산소에 문안 갈 때 아버지를 업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박장석 씨도 효행상을 받을 만했으나 그 공을 아버지에게 돌렸다고 한다.

현재 박장석 씨는 손자들과 함께 3대가 어울려 살고 있다. 그는 자식과 손자들에게 늘 인륜의 기본인 효와 사회의 기본인 전통을 지켜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효와 의리라는 전통이 낡고 보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를 이끌어가는 기본적인 가치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지금도 전통을 지켜가면서 원칙에 따라 사는 전형적인 선비이다.

[정보제공]

  • •  박장석(남, 76세, 마수리 주민)
  • •  이유성(남, 신석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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