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C03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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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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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임기
제내리에서 자녀교육과 관련하여 모범적인 가정으로 추천해 준 분은 풍덕마을 방풍림계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한 이임기 여사였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그의 텃밭에서였다. 취재에 대해 설명하고 인사도 할 겸해서 그의 집으로 방문하자 그는 집 앞의 텃밭에서 김매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는 그의 성실하고 근면한 삶의 모습이다.
‘자녀들 기른 이야기’를 부탁한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해준 것도 없고 오히려 “어머니 노릇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부끄럽다” 며 겸손해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했다” 라며 훌륭히 자란 자녀들을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동안 자녀들을 올곧게 기르기 위하여 눈물어린 노력을 해왔던 것을 자녀들도 잘 이해하였고 또한 어머니를 굳게 믿고 어머니 가르침을 잘 따랐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가정이 매우 화목했으며 어머니와 자녀들 간의 가정적 신뢰가 돈독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뜻을 어기거나 딴 짓을 한 애들이 없어서 애들 때문에 걱정해본 적이 없다” 는 어머니의 증언은 동네 분들이 추천해준 대로였으며 자녀들도 예의 바르고 품행이 단정하며 아주 착하게 자랐다는 칭찬도 과장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 주변도 없고 아이들에게 늘 부족하게 해준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인터뷰에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는 벽진이씨 충강공 이상급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혼기가 되어 옷 보따리 장사를 하는 풍덕마을 주민의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다. 1남 2녀를 두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렸으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39살의 젊은 나이에 3남매의 가장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가진 재산도 변변치 않은데다가 아이들이 이제 중학교 3년, 초등학교 6년과 1학년에 입학한 상태에서 남편마저 여의자 망망하고 앞이 캄캄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다던 그의 기억은 절박했던 당시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학비조달을 위해 어린이집에 직장을 잡았고 그 수입으로 학비를 조달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한 어머니의 증언은 “양말하나 사 신지 못했다” 는 말 속에서 결국 경제적 어려움이 아주 절실했음을 웅변해 주었다.
“내가 배운 게 없어 배우려고 하는 만큼 가르치려 했다”는 그의 가정교육 철학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가장 소박하면서도 위대한 어머니의 교육 철학이자 비결이었다. 3남매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큰 아들은 직업군인으로, 큰딸은 출가하여 가정을 꾸리고, 막내는 유아교육과를 졸업하여 어린이 교육에 힘쓰는 등 모두들 어머니의 바람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
끝으로 아이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부탁하자 ‘건강하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삶을 살기 바란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오로지 자녀를 위해 평생을 살면서 “열녀지법(烈女之法)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반듯하여 다른 이의 귀감이 된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칭찬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말해주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