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C0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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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방호지파 13대 종손인 이상하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농장에서이다. 넓은 축사가 딸린 그의 농장은 풍덕 굴지의 대농가다운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웃음 띤 얼굴에 짙게 구슬린 그의 얼굴은 후덕하면서도 온화함이 가득하였고 반갑게 맞이해 주는 부부의 친절함은 많은 손님을 접하며 살아온 종손으로서의 오랜 경험이 흠뻑 묻어있었다.
한 집안의 종손이기에 어릴 때부터 아주 넉넉하고 여유로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 유복하게 성장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내 그가 “어릴 땐 고생 많았지유” 라 이야기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 전혀 상상치 못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들을 수 있었다.
종손집의 연이은 몰락과 불운으로 어려움이 있었기에 우여곡절을 거쳐 9살 때 아버지가 종손의 대를 잇게 되었다 한다. 그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불우하게 성장했으며 더구나 가세마저 넉넉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늦은 나이인 25세가 끝나가는 12월에 입대해서 29살 되던 해 10월에 제대하였다. 군대를 제대한 그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부지런히 일을 했다 한다. 그러면서 그는 “삶이 마음대로 안되더라”하며 “때로는 운도 있어야 한다”는 달관한 그의 인생 역정(歷程)속의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또한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있다”라며 순탄하고 평범하지 않은 결혼이었음을 밝혔다. 둘째 큰어머니와 사촌 형수님의 중매로 알게 된 그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반대하는 처가에 직접 찾아가 장인이 될 분께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을 밝히고 나서야 어렵게 결혼할 수 있었다 한다.
결혼 후 그는 1979년도 사촌에게 7만원을 빌려 빈손으로 분가하였다 한다. 전지가 없어 소작을 하며 7~8년 동안 노력했으나 남는 이윤이 거의 없어 가을만 되면 “올해도 일년 늦게 난 폭 친다” 는 자조적인 말을 했다한다. 그런데다 늦게 결혼하여 자녀들도 연년생으로 태어나 아내의 고생이 더욱 컸다고 말한다. 그동안 밭농사를 주로 했으나 여러 가지 실정에 맞지 않아 거의 재미를 보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1990년도 경 농촌진흥공사에서 앞으로 농촌인구의 감소와 농민들이 줄어듦에 따라 농사짓고 싶어도 농지확보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을 지원해 줄 것이며, 기계화 영농에 편리하도록 대단위 경지정리 사업을 펼칠 것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한다. 그런데 참여자격이 자기소유의 토지 1,500여 평을 포함 3,000평 이상의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만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언젠가는 이러한 제도를 이용하면 농지 확보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앞으로 활용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다.
그 후 15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다가 1991년도부터 집안 분의 밭을 빌어 사육사를 짓고 소 사육을 시작하여 20여 마리가 되었다 한다. 그해 가을이 되자 논 900여 평이 매물로 나와 이를 매입하기 위해 소 10마리를 팔아 논을 사고 그 후에도 돈을 보태 토지를 매입하여 1500평의 자기농지를 확보한 후 집안친척의 과수원을 임대하여 1992년부터 농촌진흥공사의 자격조건을 갖추어 논을 구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논농사의 어려움이 커져 논 값의 하락세가 확산됨에도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 농지를 늘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확장된 농지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농기계의 반값보급이 시행되어 기계화 영농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농촌변화에 대한 예측과 농부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신념이 잘 조화를 이루어 한 단계씩 성장하는 당연한 발전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발전이 자기 노력을 낮춘 채 조상이 돌봐주신 덕분이라 겸손해 했다.
종손으로서의 그의 삶을 묻자 역시 조상에 대한 숭조사상이 남다름을 엿볼 수 있었다. 종손으로의 삶 역시 ‘마음의 짐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종사에는 아직 나이가 어려 많은 일은 하지 못했다는 겸손함을 보였다.
옛날 대종손하면 모든 집안이 종손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해주었지만, 요즈음 세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종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문중의 대소사를 앞서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그는 근검절약을 신조로 그 어려웠던 환경을 불굴의 투지로 극복하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지금은 제내리 굴지의 대농가가 되었고, 영농후계자로서 기계화 영농에도 앞장서고 있었다. 특히 2남1녀의 3남매를 대학까지 졸업시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는 불굴의 투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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