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C02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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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제내리의 풍덕마을에는 과거 72동의 주거 가옥이 있었다. 이중 목조가옥이 9동, 토담집이 3동, 흙벽돌집이 40동으로 전통성을 지닌 가옥이 52동이나 되었다. 나머지 20동은 17동의 시멘트벽돌 가옥과 3동의 조립식인 현대식 주거 건물이었다.
그 중 전통성 있다고 생각되는 50여 동의 건축물 중 건축학적 및 보존적 차원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이민재의 목조가옥과 이희동·이윤배의 토담집을 소개한다. 최근에 새마을 사업을 비롯한 많은 주택 개량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지역적 특성이 고려된 전통가옥이 많이 남아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점차 이 마을에도 폐가가 늘고 있음에 아쉬움이 더한다. 목조가옥으로 오래된 구조라 하여 기왕에 조사되었던 이상철 고가와 강당 건물들은 이미 철거되었고, 남은 건물들도 상당수 훼손되었거나 이미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된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남아있는 전통적 가옥들은 지금이라도 잘 복원하여 마을의 정취를 살리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제내리 407번지에 있는 이민재 가옥은 약 200년 전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대체로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전체 배치는 우등산을 배경으로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완만한 땅의 지세에 따라 남서향으로 정지한 후 외부로 개방된 바깥마당에 면해서 1단의 기단 위에 정면 8칸, 측면 2칸의 사랑채가 “一”자형으로 배치되고 있다. 그리고 사랑채의 중앙부 1칸에 안채로 출입할 수 있도록 판장문의 대문을 달고 있으며, 이 대문을 들어서게 되면 넓은 안마당이 위치하고 안마당에 면하여 1단의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에 다시 꺾어서 정면 5칸, 측면 1칸을 덧붙인 안채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가옥의 전체적인 배치는 중부지방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ㄷ”자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중 2칸을 통칸(通間)의 우물마루로 하여 넓은 대청으로 꾸미고 있다. 이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의 2칸 중 1칸은 전퇴(前退)의 누(樓)마루를 설치고, 그 하부에 함실을 설치한 건넌방을 두고, 나머지 1칸은 사당(祠堂)으로 꾸미고 있었으나 지금은 온돌방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 대청 좌측 “ㄱ”자형으로 꺾이는 부분에 2칸의 안방과 1칸의 웃방 그리고 2칸의 부엌이 위치하고 있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60㎝의 툇마루를 달아 안방으로의 출입을 돕고 있다.
기둥의 간격은 전체적으로 2.4m로 균등하게 구획하고 있고, 처음 사당으로 사용했던 부분은 3.0m로 조금 넓게 구획하여 공간을 크게 잡고 있다. 구조는 안마당에서 60㎝의 자연석 기단이 축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시멘트로 개조되어 있으며, 그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그 상부에 18×18㎝ 각의 방형주(方形柱, 네모기둥)를 세우고 있다. 기둥 상부의 구조는 간단한 부재를 건물 내외부로 돌출시켜 대량(大樑)의 하중을 단부에서 지지하고 있는 형식의 민도리 계통으로 가구되어 있다.
가구는 전방 퇴주(退柱)와 후방 평주 사이에 내고주(內高柱)를 세워 대량과 퇴량(退樑)을 결구하고 있는 형식으로 대량의 중앙부에 높이 15㎝의 낮은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량(宗樑)을 받고 있다. 또 종량의 상부에는 높이 45㎝의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세워 종도리와 함께 옥개하중을 부담하고 있는 1고주 5량 집이며, 처마 깊이 90㎝의 홑처마로 된 팔작기와 지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중앙부의 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은 툇마루로 구성된 온돌방과 대청을 두었고, 대외적이고 사회적 생활공간인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있다. 그리고 대청의 정면에는 툇마루로 출입하도록 4분합 띠살문을 달아 전체적으로 대외적 기능에 맞게 개방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우측은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된 상태이나 좌측은 온돌방과 광으로 최근에 각각 개조되어 있어 원형을 많이 잃은 상태이다.
기둥 간격은 온돌방과 대청 그리고 대문이 설치된 중앙부 등 정면 8칸의 모두를 2.4m로 균등하게 구획하여 분할하고 있다. 구조는 바깥마당에서 70㎝의 자연석 기단이 축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시멘트로 개조되어 있으며, 그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그 상부에 16×16㎝ 각의 방형주(네모기둥)를 세우고 있다. 기둥 상부의 구조는 창방과 주두가 없이 납도리로 된 주심도리가 대량과 함께 결구되어 있는 민도리 계통으로 되어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 위에 대량을 결구하고 있는 형식으로 대량의 중앙부에 높이 24㎝의 동자주 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함께 옥개하중을 부담하고 있는 4량 집이며, 원래는 처마깊이 60㎝의 홑처마 초가지붕이었다. 그러나 1973~74년에 걸친 새마을 사업으로 인하여 지금은 우진각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되어있다.
제내리 407번지에 있는 이만호(이희동) 가옥은 마을의 주택가에 1900년에 건축되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는 전통적인 홑집형 토담집이다.
전체 배치는 우등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복호동산을 바라보며, 완만한 지형을 동남향으로 정지한 후 1단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안채는 “ㅡ”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외양간과 헛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간단하게 슬레이트 지붕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는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안채의 정면 3칸 중 중앙부에 안방을 배치하고 우측에 웃방 그리고 좌측에 부엌 및 봉당으로 구획하여 놓고 있다. 또 안방과 웃방의 앞부분에는 퇴를 구성하여 봉당을 만들었으나 최근에 마루를 설치하여 사용하고 있다.
기둥 간격은 안방은 3.3m, 부엌 및 봉당은 3.4m로 거의 같게 구획하고, 웃방은 2.9m로 조금 작게 구획하고 있다. 구조는 높이 35㎝의 자연석 기단 위에 전면 퇴칸부는 덤벙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주경 15㎝의 원형주를 세우고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흙을 쌓아서 만든 토담의 벽체로 축조하고 있다.
기둥 및 벽체의 상부 구조는 전면 퇴칸부는 기둥 위에 도리를 얹고, 토담의 벽체는 흙벽으로 마감하고, 그 위에 직각 방향으로 서까래를 걸쳐놓아 지붕을 구성하고 있다. 지붕은 본래 초가였으나 1973~74년에 걸친 새마을 사업으로 인하여 지금은 처마깊이 45㎝의 홑처마 우진각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된 전통 민가 건축으로 우리나라의 서부형 토담집 형상을 보이고 있다.
재내리 407번지에 있는 이종하(이윤배) 가옥은 마을의 주택기에 의하면 1900년도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오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홑집형 토담집이다.
전체 배치는 멀리에 우등산이 가깝게는 마을 뒷산을 배격으로 완만한 지형을 남동향으로 정지한 후 1단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안채가 “ㅡ”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좌측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외양간과 헛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간단하게 슬레이트 지붕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채의 좌측 1칸에 부엌 및 봉당으로 구획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 그 사이에는 높이 80㎝ 정도의 벽을 쌓아 부엌과 봉당을 동시에 밝혔던 조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중앙부에는 안방을 배치하고, 그 옆으로는 웃방을 설치하고 있으며, 안방과 웃방의 앞부분에는 흙바닥의 봉당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기둥 간격은 안방은 2.7m 웃방은 2.6m로 거의 같게 잡고 있으며, 부엌 및 봉당은 3.6m로 넓게 구획하고 있다. 구조는 높이 90㎝로 높게 축조된 흙을 쌓은 1단의 토단 위에 전면의 퇴칸부는 덤벙주초석을 놓고, 그 상부에 주경 15㎝의 원형주를 세우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흙을 쌓아서 만든 토담의 벽체로 축조되었다. 기둥 및 벽체의 상부 구조는 전면의 퇴칸부는 기둥 위에 도리를 얹고, 토담으로 된 벽체는 그대로 마감하고, 그 위에 직각 방향으로 서까래를 걸쳐놓은 초가지붕이었다. 그러나 1973~74년의 새마을 운동으로 지금은 처마깊이 45㎝의 홑처마 우진각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되어 있다. 대체로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는 전통적인 토담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