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C02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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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1970년 10월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시작된 이른바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 한 범국민적 운동이었다. 1970년 가을 전국의 모든 농촌마을에 일괄적으로 시멘트를 지원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총의에 따라 공동사업에 쓰도록 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물리적 환경 개선은 물론이고 소득을 증대하고 정신계발도 포함하는 광의의 국민운동으로 정립되었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의 참여는 새마을 운동의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내리의 새마을 운동은 성동마을보다는 풍덕마을에서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풍덕마을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마을을 위한 일이라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협동의식이 충만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단일 씨족마을의 전통적 유습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 생각된다. 이처럼 협동 단결된 마을정신은 새마을 운동에서 더욱 빛나는 결과를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풍덕마을에서 추진된 새마을 사업의 추진 과정은 국가 주도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이 지역의 단위마을에서 어떻게 시행되고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필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풍덕마을의 새마을 운동의 추진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971년 새마을 1차 사업으로 마을회관을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이 건립되자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각종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자연 선진적인 새로운 생각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2년 11월 새마을 지도자로 이상을을 선출하고, 청년들이 앞장서서 새마을사업 추진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1972년 12월 마을의 면모를 바꾸기 위한 사업계획을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① 마을의 진입로 확장 ② 마을 안길 확장 ③ 암거 가설 ④ 하수구 정비 등이다. 이에 대한 측량과 사업량을 조사하고, 부녀회원도 동원하기로 하였다.
1973년 1월 25일 위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마을 이장에 이상을, 개발계 서기에 이상인으로 개편하였으니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사업을 앞두고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주민들의 여론에 이상인이 사양하였고, 다만 개발계는 종전대로 이세영이 맡기로 하였다. 2월에 새마을 지도자는 이자호, 부녀지도자는 이복순이 담당하기로 하고 계획된 사업을 농사철 이전에 완료할 것을 목표로 추진하였다.
3월 17일 군에서 새마을 과장 등이 나와서 진행 중인 사업 현장을 둘러보고 다른 지역을 견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견학 후 당초의 계획을 확대 변경하여 마을 안길을 50m 단위로 곧게 바로잡기로 한 것을 100m 기준으로 하고, 길 폭도 4m에서 5m로 넓히기로 하였으며, 밖의 변소는 철거하고, 전 가옥의 지붕 개량, 담장 개량, 도랑 석축, 암거 가설 등 사업이 방대하게 확대되었다.
새로운 마음다짐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주민 모두가 주야로 작업을 해야 했다. 시찰나온 도지사가 지붕 개량사업으로 골목마다 썩은 새가 깔려 있어 행보가 어려울 정도가 되자, ‘이제 새마을 사업을 그만하고 농사일에 힘쓰라’고 할 정도로 사업을 벌여놓았다. 더구나 이 해부터 모심기 일주일 앞당기기 운동이 일어나 다른 마을은 논갈이가 한창이었다. 풍덕마을 사람의 논만 풀이 무성한 것을 보고 타동리 사람들이 풍덕은 ‘새마을 사업으로 농사 망친다’ 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임원들이 생각다 못해 총회를 열고, 논갈이와 모심기는 협업화로 내 것 네 것 할 것 없이 들 떼기로 하기로 하고, 부녀자도 모심기에 나와 줄 것을 호소하였다. 시간이 촉박한지라 모두 찬성하고, 반별로 작업하기로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작업을 시작하니 다른 동네보다 일주일 늦게 시작한 모심기가 오히려 3일을 앞당겨 끝내게 되었다. 관계 기관과 이웃동네에서도 과연 저력이 있는 마을이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부녀자들이 농사일에 나서기 시작하는 전례가 되었다.
이 사업에 동원된 총 인원이 9,240명으로 호당 평균 120명씩 출역한 셈이 되었다. 야간 횃불 작업을 병행하여 작업을 마무리할 정도가 되었다. 이 해에 시행한 사업으로 6월 22일 공동 목욕탕을 세웠으며, 26일에는 재일 거류민단 아오모리현[靑森縣]본부에서 자매결연 성금으로 1,749,957원을 군수로부터 전달 받아 소하천 3곳 670m에 석축을 쌓아 장마 때면 침수 위협을 받고 있던 농경지 1만 2천 평과 집 60채를 보호하게 되었다.
7월 9일에는 공동 목욕탕의 용수를 위해 동샘 위에다 샘을 파고, 양어장에 분수대를 설치하였다. 7월 10일에는 속담 동샘에 공동 빨래터를 만들었다. 10월 24일 논두렁 바로 잡기 사업이 확정되었으므로 풍덕 텃논과 구실골 텃논을 하기로 하였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내방한다고 하여 도청 관계관을 비롯하여 군수와 면직원들이 모두 나와 직접 청소를 하였으나 오지 않았다.
11월 22일 광주에서 열린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서 이세영이 새마을 훈장 근면장을 받았다. 12월 23일에는 마을에서 유공자로 이자호·이상을·이복순·이상인·이윤배·이상혁 등에게 표창하였다. 풍덕마을을 중흥시킨 일꾼들이라 하겠다.
1973년 10월 24일 논두렁 바로잡기 사업의 확정을 본 풍덕마을에서는 마을 안 텃논과 구실골 텃논 6정보를 사업구역으로 정하고, 11월 15일부터 논두렁 바로잡기 공사의 세부측량을 시작하여 이듬해에 마을 주민들의 노력을 중심으로 공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풍덕마을에는 새마을 사업이 가장 활발했던 72년 연말부터 73년까지 시행된 새마을 사업경과 보고서가 있다.
새마을 사업 경과보고서 (1972. 11. 7.~1973. 12 31.)
1972년도
11. 7. 풍덕마을이 기초마을로 선정되어 양회 700포와 철근 1톤이 배정되었음. 새마을 사업 준비 차 총회를 개최하고, 새마을 지도자에 이상을을 선출하고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함.
11. 10. 새마을 양회 700포 입하, 비료 창고에 보관.
11. 16. 새마을 총회 개최. 새마을 사업계획안을 토의했으나, 임원에 위임키로 함.
12. 6. 새마을 총회 개최하고 사업계획안을 확정, 확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마을 진입로 확장.
2) 마을 안길 확장.
3) 소 교량 가설.
4) 하수구 정비
12. 12. 마을 안길 측량 및 기타 사업량 조사. 밤에 임원회를 개최하고 사업규모를 축소키로 함.
12. 22. 새마을 총회 개최하고, 사업 일자, 이탈자 방지와 단합된 행동으로 타 부락에 비해 낙후된 것을 만회할 것을 다짐함.
12. 23. 성동 거주 정태석의 전 200평(서방 모랭이)을 매입함.
12. 24. 새마을 사업 기공함. 부녀회원도 동원키로 함.
12. 27. 금가면 지서에 근무하는 이주영 씨에게 마을 안길확장용지 승낙 받고자 이복영 파견.
12. 28. 도정공장 앞 아카시아 나무 베다가 이상목이 낙상하여 주덕의원에 입원.
12. 29. 이상을 집 앞 미루나무 베다가 전선 절단으로 한전에 4,900원 변상함.
1973년도
1. 8. 새마을 성금 거출. 밤에 임원회 개최하고 사업대책 협의.
1. 18. 성동 거주 이동수의 논(방풍림 뒤 동편) 80평 매입.
1. 19. 마을 안길 확장용지 승낙받고자 서울 거주 이상필 씨에게 이상덕·이상을 파견.
1. 21. 마을 안길 확장공사로 노면이 진수렁이 되어 보행난으로 모래펴기 운동을 전개하여 모래를 2일간 운반함.
1. 22. 새마을 설계 및 도면 작성을 이세영이 한 달간 함.
1. 25. 정기 부락총회에서 이장 이상을, 개발계 서기 이상인을 선출해 완전세대 교체 단행함. 그러나 방대한 사업 진행 중에 일꾼을 몽땅 개선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이론이 분분하였고, 이상인이 사양함으로 난관에 봉착.
1. 27. 이장은 이상을로 하되 개발계 서기는 이세영으로 해야 된다는 여론이 지배적 이여서 협의 절충하여 이세영이 재임하는 조건으로 수습되었음.
2. 5. 이상을 이장 취임
2. 6. 이장과 서기 선출 문제로 분분했던 여론을 통일하고 사업 추진에 차질이 없게끔 새마을 단합대회를 개최.
2. 11. 이상을 신임 이장 주재로 임원회 개최하고 사업 재개발을 다짐함.
2. 14. 부락총회(남녀 합동)를 개최하고, 새마을 지도자로 이자호를 선출하고, 새마을 사업은 영농기 이전에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녀호당 2인씩 매일 출역하기로 굳게 다짐함.
2. 23. 청주문화방송국에서 새마을 사업 현지 취재차 내방.
2. 24. 새마을 설계서 및 도면작성은 이세영, 새마을 업무일지 및 제반문서는 이상인, 이장은 동원, 지도자는 사업 감독을 담당하기로 하고, 여자 지도자에는 부녀회장인 이복순으로 추천함.
3. 10. 모래채집. 철근 1톤 입하.
3. 15. 목재(거푸집용) 제재.
3. 17. 김낙응 중원군 새마을과장, 김흥해 계장이 내방하여 현재까지 진행한 마을 안길 확장공사를 둘러보고, 좀더 알찬 새마을사업을 하자고 하며, 이세영과 이류면[현 대소원면]과 대곡리 도로변 조경사업을 견학하고 와서 사업의 확대를 군에서 종용함.
3. 18. 임원회 개최하고 새마을 사업 확대론을 토의 결과 결론을 못 얻음.
3. 22. 새마을 설계서 완성. 마을 안길 확장용지 승낙 받고자 충주 거주 이상립에게 이상을·이복영 파견
3. 24. 군과의 협의로 새마을사업을 확대하고자 사업계획을 변경함.
3. 25. 사업의 확대를 위해 군에서 지원키로 하여, 군 트럭으로 골재를 운반하고, 현재까지 확장한 마을 안길을 다시 100m 기준으로 곧게 내기로 하고, 불량 건물(외부변소)을 철거하고, 완전 개즙과 담장개량, 도랑 석축 및 낙차공 소교량 가설도 완전 5m로 하는 방대한 사업에 다시 착수하게 됨.
3. 27. 국방대학원생 새마을 사업 시찰차 내방. 도랑 석축용으로 깬돌 포천에서 운반함. 남녀 노소 없이 총동원하기 시작함.
4. 1. 도랑 석축 시작함.
4. 4. 노은면 각 이동장 및 지도자 40명 내방. 방풍림 조경 사업으로 뙤돌 쌓기 시작함.
4. 8. 청주교육대학생 및 교수 등 40명 새마을 평가차 내방.
4. 9. 불럭 제작하기 시작. 남녀노소 없이 총동원되어 암거가설, 낙차공석축, 불량건물 철거, 개즙, 담장개량 등 사업에 열을 올려 박차를 가함.
4. 10. 충북도 부지사가 새마을 지도과장을 대동하고 새마을 독려차 내방.
4. 13. 토관 제작 시작
4. 24. 주덕 단위농협에서 60만원 차입.
4. 27. 태종학 충북도지사가 정보과장, 보안대장, 중원군수, 충주 경찰서장 대동하고 새마을 사업 독려차 내방하여 금일봉 희사.
4. 28. 새마을 소득 사업으로 밤나무 양묘를 하기로 하여 중원군으로부터 밤 5가마를 보조받아 파종함.
5. 1. 중원군수 및 군내 각면장, 새마을 시찰차 내방. 이준영의 논(옥동학교 옆) 5평 매입.
5. 2. 총 사업추진은 7할에 미치지 못하고 영농기가 닥쳐오니 부락민들은 영농에 지장을 초래할까 불안해하고, 지도자들과 행정당국은 당황하기에 이르렀다. 충북지사도 사업을 너무 방대하게 확대했다고 걱정을 하였다.
※이에 대응책으로 군 새마을과장 이하 직원이 주재하고, 군의 트럭은 풍덕전용으로 사용키로 하며 적극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5. 3. 충북지사가 풍덕마을이 크게 사업을 벌이고 있으니 가 보아 경제동향보고케 해달라는 부탁으로, 김형배 내무부 새마을 과장이 경제동향보고 마을 선정차 내방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5월 15일까지 사업을 마무리할 수 없겠다고 하면서, 괴산군 연풍면 신풍마을을 시찰하고 왔다는 것이다.
5. 4. 군으로부터 신풍마을이 경제동향보고가 될 것 같다는 전갈이 옴. 신풍마을과 경쟁케 되었다.
※부녀회원들도 더욱 적극적이며 열성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음.
5. 13.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 개발계 서기 등이 신풍마을을 시찰하고 옴. 절미통을 구입하여 부녀회원에게 배부함.
5. 14. 불럭 8,694매, 토관 340개 제작 완료하고 토관 100개를 구입함.
5. 16. 도정공장·창고·구매점·이발소와 방풍림 일대의 환경정리 작업 완료함.
5. 19. 서방랭이 언덕 손질에 5일간이나 야간작업을 함.
5. 20. 단양군새마을과장 시찰차 내방. 조선일보 기자 새마을 취재차 내방.
5. 21. 경제동향보고에 신풍마을이 결정되었다는 전갈을 받음. 풍덕은 사업추진이 부진을 이유로 탈락됨.
5. 24. 분개한 부녀회원들이 전세버스를 이용하여 비교하기 위해 신풍부락을 시찰.
5. 25. 새마을 총회 개최하고, 사업은 이앙관계로 우선 중지하고, 논갈이 등을 협업화로 새마을 정신으로 해결하자는데 협의. 반별로 28일까지 논갈이를 끝맺고, 29일부터 이앙을 하자는데 결의를 다짐함.
5. 26. 이앙관계로 부락민 동원은 중지하고 외처인을 고용하여 서방모랭이 언덕 손질을 마무리함.
6. 1. 중원군 농협에서 100만원 융자받음. 풍덕 마을금고에서 853,814원 융자 받음.
6. 9. 충청북도 우수 대표 마을로 선정됨.
6. 10. 중원군에서 가로수 20주 기증받아 제재(거푸집용).
6. 13. 김보현 농수산부장관, 충북지사와 충북진흥원장을 대동하고 내방.
6. 21. 부락총회 개최하고 성금사업계획 수립협의.
6. 22. 충주의사협회에서 위생보조금 5만원 수령, 목욕탕을 건립키로 함.
6. 23. 성급사업계획서 작성
6. 25. 부락총회 개최하고, 성금사업계획 확정. 성금사업으로 측구석축 미완성분 400m 완공키로 군과 합의. 새마을 보수작업 시작.
6. 26. 재일 거류민단 아오모리[靑森]현 본부와 자매결연 성금으로 1,749,957원 중원 군수로부터 수령.
6. 27. 부락총회 개최하고 성금 수령보고 및 성금사업 시행문제점 토의.
6. 29. 성금사업 석축용 깬돌 입하.
7. 2. 측구 석축 각 반별로 시작.
7. 3. 공동목욕탕 기공.
7. 9. 목욕탕 용수용 우물을 팠으나 수질이 불량하여, 동샘 물을 쓸려고 했으나 성동의 반대로 동샘 위에다 다시 팠다. 양어장에 분수대 설치 및 양수기설치.
7. 10. 2반에 공동 빨래터 기공.
7. 11. 경희대학생 56명 내방하여 7일간 봉사함.
7. 23. 청주여대학생 22명 내방하여 7일간 봉사함.
7. . 절터골 소류지 여수토(餘水吐) 보수공사 기공. 공사책임 이복영.
8. 2. 청와대 새마을 사진반 새마을 취재차 내방.
8. 3. 공동목욕탕 준공. 준공식에 충주의사협회의 엄 외과원장, 아낙진 원장, 장소아과 원장, 충주도립 병원장 등 참석.
8. 13. 절터골 소류지 여수토공사 거푸집 철거.
8. 16. 괴산군 연풍면 신풍마을 이장, 지도자 등 시찰차 내방.
8. 18. 김종응 중원군수 신임 초도순시차 내방. 마을 안길 정리. 밤에 부락총회 개최하고, 새마을 관계 보고함.
8. 22. 임원회 개최하고, 새마을 중간 결산보고.
8. 23. 청와대 민정 담당비서 성금사업 확인차 내방.
8. 25. 절터골 소류지 보수공사 준공.
8. 26. 새마을 중간 결산총회 개최. 이장 사의 표명하고 임원 총사퇴.
8. 28. 부락총회 개최하고, 이장 선출문제는 당분간 유보키로 하고, 내무부 출입기자단 내방 준비 관계는 이세영이 책임지도하기로 함.
8. 29. 새마을 사업 사후관리 작업을 각 반별로 함.
9. 5. 내무부에서 풍덕마을 공중촬영. 엄정면 원곡리 청년회, 4H회원 등 50명 견학차 내방
9. 7. 절터골 소류지 보수공사 준공검사.
9. 8. 전 호수의 개즙, 이석영가를 최종으로 완결.
9. 12. 새마을 노래잔치를 개최함(청년회와 4H회 주최).
9. 13. 충북도 부지사, 도 새마을지도과장·중원군수 대동하고 새마을 시찰차 내방.
9. 14. 담장 개량, 이세영·이자호가를 끝으로 완결.
9. 19. 서방모랭이 뙤돌쌓기 시작함.
9. 21. 성금사업 감사차 내무부 감사반 내방하여 감사함.
9. 26. 박정희 대통령 내방 준비차 이상룡 도 새마을계장 내방.
9. 28. 임원회의 개최하여 이장 문제와 개발계 서기 보수문제 합의하고, 개발계 서기에 이자호를 선출하고 새마을 지도자를 겸임케 함. 이장은 이세영을 추천하였으나 본인의 거부로 유보함.
9. 30. 새마을 지도자 중앙교육자로 군에서 이세영이 지명 받아 출발. 성금사업 완료.
10. 1. 이장에 이세영을 임원회에서 추천하고 면에 제출함.
10. 3. 서방모랭이 뙤돌쌓기 완료.
10. 4. 오룡운 충북 지사 초도 순시차 내방하고 금일봉 희사.
10. 12. 이세영이 임원들의 권유로 이장을 수락하고 취임.
10. 15. 74년도 양묘용 아가시아 종자 구입 시작.
10. 19. 동양방송 기자 새마을 및 통일벼 단지 취재차 내방.
10. 24. 논두렁 바로잡기 사업 확정으로 동의서 작성, 6정보.
10. 25. 대통령 방문한다고 26일 밤 10시에 면 재무계장이 연락하여 옴.
10. 26. 대통령 내방 준비차, 면 직원 총동원하여 청소. 중원군수와 주덕 면장 청소 독려차 내방. 도 새마을 지도과장 내방하고, 성공사례 발표작성을 요구. 밤나무 묘목 지도원 내방(청와대 심사에 대비하고자).
11. 1. 새마을 궐기대회 개최.
11. 3. 청와대 민정반 성금사업 심사차 내방.
11. 6. 논두렁 바로잡기 및 세천(細川) 공사 실지답사(옥동과 밤나무골). 반장회의 개최하고 74년도 새마을 사업 계획 작성.
11. 10. 논두렁 바로잡기 설계 및 논두렁 바로잡기 동의서 작성.
11. 11. 부락총회 개최하고 논두렁 바로잡시 사업 확정.
11. 13. 아카시아 종자 채취. 가로수 및 개나리 식재함.
11. 18. 청주대학교생 및 교수 등 40명 새마을 평가차 내방.
11. 22.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광주)에서 새마을 훈장 근면장을 이세영이 받음.
11. 23. 부락총회 개최하고, 전국 새마을 지도자대회 참석 경과를 보고함.
11. 24. 조선일보 1면에 풍덕마을 전경(항공촬영)을 게재하고 소개됨.
11. 25. 하사금(우수마을 특별지원금) 사업계획을 위해 부락총회 개최하고, 육성우 사업을 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함. 새마을 지도자 이자호 사의표명.
11. 29. 중앙 행정개혁위원, 충주검찰 지청장·중원 군수 대동하고 새마을 시찰차 내방.
12. 5. 아카시아 묘포 선도조(先賭租)로 구입.
12. 12. 논두렁 바로잡기 측량, 충청토목 설계사에서.
12. 20. 동양방송 기자 새마을 취재차 내방.
12. 23. 새마을 유공자 이자호·이상을·이복순·이상인·이상근·이윤배·이상욱·이상혁을 표창함.
12. 26. 대통령 하사금(우수마을 특별지원금)을 중원군에서 수령함.
12. 27. KBS TV 주최, 전국 새마을 경연대회에 풍덕마을이 추천되어 이세영·이자호 출연함.
12. 28. 청주교육대생 및 교수 등 50명. 새마을 평가차 내방함.(『주덕읍지』, 주덕읍지편찬위원회, 2007, 962쪽 참조)
이는 풍덕마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농촌마을 새마을사업의 추진과정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소중한 자료라 생각된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주요사업 역시 마을 개발 사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974년에는 논두렁 바로잡기 사업이 시행되었고, 1975년 사업으로는 농로 확장, 마을 안길 석축 쌓기, 이태리포플러 심기 등이었다.
1977년의 사업은 다음과 같다 ① 소 교량 4개소(구실골 도량)를 가설하였으니, 학교 앞에서 장록개로 가는 길, 구실골에서 갓골로 가는 길, 구실골에서 절터골로 가는 길, 등너머에서 절토골로 가는 길에 있는 도랑, ② 묘목 사업으로 이태리 포플러 600평, 쪽제비 싸리 300평 .③ 회벽을 전 주택에 발랐다.
1974년부터 오르기 시작한 소값이 계속 오름세를 보이자 양축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77년 10월 19일에 중원군에서 육성우 사업을 하여보라고 하여, 마을총회를 열었으나 공동사업에 지친 부락민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그러나 군의 보조금 사업임으로 군의 요청에 따라 1978년 1월 6일 마을총회에서 새마을 보조금 1백만원을 받아 육성우 사업과, 양묘 사업을 병행하여 추진키로 하였다. 공동 축사는 구 축사를 헐고 새로 짓되 소방기와 농기구 창고도 세우기로 하여 5월 9일 완공을 보았다.
그리고 이세영·이복영·이자호 세 사람이 9월 25일 충주와 음성에서 송아지 4마리 구입하여 축사에 입식하였다. 그러나 1978년부터 소 값의 폭락으로 적자 운영되어 79년도에 폐쇄하게 되었다. 농촌 사업의 어려움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겠다.
농촌 근대화 사업은 우리의 살림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한 반면 문제점도 있었다. 특히 생활용수로 인한 오염으로 식수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공동 우물에 의존하던 식수가 생활오수로 인해 오염이 되어 상수도 시설이 시급하게 되었다. 1978년도 개인의 샘과 지하수 관정은 불과 서너 집에 불과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발계에서는 여러 곳을 다니며 상수도 시설에 대한 지식을 얻고, 관계 기관과 교섭하여 1978년 10월에 상수도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비용부담의 문제로 일부의 반대도 있었으나 설득하여 11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5월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당초에는 요도천의 물을 끌어오려고 하였으나 시설비 관계로 제2방풍림에 지하수를 파서급수관을 묻고 양수기로 마을 뒷산(복호동산)에 올려 저수하여 공급하는 방법으로 수질 좋은 물을 공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용가의 무절제한 수돗물 낭비(꼭지를 항상 열어놓아)와 겨울에는 동파가 많아 누수되는 물이 많아져서 공급이 달리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전기료가 많아지니 요금도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이장의 애로가 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급기야는 개인들이 각자 지하수를 파는 집이 늘어나게 되면서 간이 상수도는 폐쇄되고 말았다.
농촌의 경제력이 향상되어감에 따라 마을을 출입하는 교통량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마을 안길의 포장이 시급하게 되었다. 새마을 지도자가 군수에게 간청하여 1982년 4월에 525번 도로에서 덕신교회까지 130m의 진입로 포장공사를 지원 받게 되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주민들이 동원되어 마무리하였다.
1984년 11월 24일, 새마을 서훈 지도자 간담회에서 새마을 사업 한 건씩을 배정하여 줄 것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 사업으로 교회 앞에서 방풍림에 있는 유아원까지의 포장공사를 하였다.
1987년 4월 30일, 유아원에서 2반까지 마을 안길을 포장하였다. 이때부터는 레미콘으로 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7월 31일, 1반의 진입로 60m의 포장을 이세영의 충청 보훈 대상 상금 1백만원과, 군의 보조금 140만원으로 포장을 하였으며, 2반에서 3반까지의 안길은 새마을 사업으로 포장을 하였다.
1990년도 이후에는 농어촌 정주권 사업으로 풍덕 고개와 성동에서 숲거리까지의 길을 포장하고, 구실골을 비롯한 기타의 길은 군에서 직영하여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여러 해를 두고 단계적인 사업으로 포장공사를 마무리하였으나, 앞서 한 곳은 오래되어 일부 파손된 곳도 있어 재포장이 요구되던 중 1997년에 충주시에서 마을 입구의 진입로 일부를 아스팔트로 포장을 하여 깨끗한 거리가 되었다.
새마을운동을 주도하기 위하여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컸다. 풍덕마을의 역대 새마을 지도자는 12명인데 이들은 모두 마을과 지역사회의 발전과 개발을 위해 힘써왔다. 그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을(1972. 11~1973. 1), 이자호(1973. 2~1974. 12), 이상인(1975. 1~1975. 12), 이상억(1976. 1~1976. 12), 이세영(1977. 1~1978. 12), 이상근(1979. 1~1980. 12), 이세영(1981. 1~1981. 12), 이상은(1982. 1~1983. 12), 이상욱(1984. 1~1985. 12), 이상근(1986. 1~1991. 12), 이형배(1992. 1~2005), 이상표(2006~현재)가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