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A03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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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구 |
미륵리 토박이 양재옥 씨(70세), 그는 끝끝내 고생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후회하는 빛은 전연 없다. 그저 담담하게 말한다.
수안보초등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너무 멀어서 거의 못 다녔다. 밥을 싸고 책을 짊어지고 집을 나서지만 어린 나이에 30리 길을 걷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기에 가다가 다리 아프면 학교를 안가고 놀았다고 한다. 대부분 부모들도 알고 있어 야단도 맞지만 이해를 했기에 반도 못다녔다고 한다. 그래도 “자기 이름자는 쓸 줄 알아야 한다” 는 어른들의 성화에 한문 공부는 15살이 되도록 했다. ‘한 것도 읍시 나이가 먹어 가니’ 결혼을 하고 아들, 딸 낳다보니 공부 가르치랴, 먹고 살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저 배운 거 없이 농사만 지었단다. 담배 농사를 지어서 공부를 시켰는데 당시 담배 농사는 품이 많이 들었다. 꼭지를 만들고 싸매고 축을 맞추고 색깔을 갖추어야 했다. 또 담배 찔 적에는 밤에 잠을 못 잤다. 불 관리를 잘못하면 담배 등급이 낮아지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식들 공부시키느라고 지금은 다 팔아 버리고 땅이 없단다. 요즘은 고추, 들깨 등을 조금 심는다. 자식들 주는 재미에 조금 짓는데 요즘에는 자식들도 안 갖다 먹는다고 조금 서운해 하는 빛이다. 그렇게 고생했어도 자식들은 다 먹고 살게끔 해줬으니 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당신 얼굴은 햇빛에 그을고 걱정에 주름살이 늘었어도 내 할 일은 했다는 자신감 일게다.
점차 마을 일도 맡아서 했다. 처음에는 반장을 맡아서 하였고, 몇 년 후에는 이장을 맡았는데 하필 안말 이주 문제가 터졌을 때 이장을 맡아 고생을 좀 했다고 한다. 안말 사람들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초가를 스레트 지붕으로 갈았고 또 현재의 미륵대원 터로 집단 이주하면서 벽돌집을 지었으며 다시 발굴 조사를 이유로 집단 이주를 결정했을 때는 돈이 없어 이주를 못한다고 마을 사람들이 반발하였다. 이 때 이장을 맡아서 당시 중원군청 개발계를 드나들고 중원군수와의 면담을 통해서 민원을 제기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이주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주대책 회의를 5일에 한번 정도 하였는데 의견 충돌로 싸움질도 했다고 한다. 결국 집터를 구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마을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점말 터를 사서 집을 짓고 이주를 하였다. 덕분에 아직 마을 터에 집을 가진 이들은 도지를 내고 있다고 하였다. 대동계장 일도 맡아 보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협조가 잘되어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미륵리 노인회장직도 맡아 보고 있다. 마을 어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는 혼자 산다. 부인은 환갑을 넘기고 죽었다고 했다. 그래도 죽기 전, 부인의 환갑이 닥치자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사람들과 식구들이 모여 조그맣게 잔치를 했다고 했다. ‘그리구 죽잖어’한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 표정이다. 이후 자식들이 같이 살자고 하더란다. “자식들이 오라는데 … 시내 아파트에 가서 가만히 있으면 뭐 해여 … 아들은 6시에 일어나 일 나가는데 메느리는 9시가 되도록 자는데, 허~허~속에서 천불이 나는 걸. 여기선 나가고 싶으면 한밤중이라도 나가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 느 하고는 같이 못 살어” 했단다.
이젠 농사 질 필요도 없다고 했다. 아니 질 수가 없다고 한다. “멧돼지 땜에 하지도 못 혀. ” 김도진 씨(78세) 내외가 고구마를 심었는데 멧돼지가 다 뒤집어 놓고 갔다고 했다. 야생동물 보호법 때문에 덫이나 올무도 안되니 걱정이라고 한다.
미륵리의 양재옥 씨는 술을 좋아한다. 입으로는 농사를 안 짓는다고 하면서도 올해도 어김없이 고추, 들깨를 심었다. 그는 혼자 살면서도 혼자가 아니다. ‘읍시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가장 넉넉하게 사는 미륵리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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