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A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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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구 |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서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만수교를 중심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분명히 구분되고 있지만, 자연적으로는 월악산을 껴안는 송계계곡으로 인위적 구분은 할 수 없는 지역이다. 시의 경계는 안내되어 있어도 누구 하나 의식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냥 계곡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곳일 뿐이다. 가끔 보이지도 않는 선으로 금을 그어 놓고 내 땅, 네 땅, 구분짓는 사람들이 우스워지기도 한다. 인간의 욕심과 편의주의가 이곳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한다.
송계계곡 은 절골이다. 또한 중요한 동서교통로이다. 신라 아달라이사금 때 계립령이 개통된 이후 월악산을 낀 이 도로는 전략적 요충지로 성장하였다. 다소 무리한 해석이 될지 모르겠지만, 각 시대의 지배세력은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사찰의 건립이 아니였을까? 불교를 장려하여 민심을 끌어안고 역, 원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으면서도 유사시에는 승병을 동원한 군사력 확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니 일석삼조(一石三鳥)아니였든가 … 그래서인지, 아니면 월악산의 정기를 빌어 해탈을 하고자 함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쨌든 송계계곡은 큰 절집들이 줄줄이 있었다.
그 출발점이 미륵사였다. 비록 미륵사는 없어졌지만,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서 규모를 짐작케 한다. 미륵사는 석굴사원의 규모를 보이면서 하얀 얼굴이 기이한 10여 m의 석불입상, 6m 규모의 5층 석탑, 균형잡힌 8각 석등, 시대의 차이는 보이지만 활짝 핀 연꽃 속에 선 4각 석등,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것 중 가장 크다는 거북돌, 돋을새김한 연꽃이 아름다운 당간지주, 절터 옆에 미륵대원 터,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쓸쓸함을 보이면서도 단아한 3층 석탑 등이 있어 미륵사의 옛 영화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신라 말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공주가 연계된 설화도 미륵사, 덕주사, 송계계곡을 또 한 번 신비롭게 각색하는 힘을 보여준다.
미륵사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중간에 빈신사 터가 있다. 절집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여기도 대단한 곳이었음을 과시하는 듯한 석탑이 남아 있다.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석탑’이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세워진 탑으로 일반형의 석탑에서 벗어나 4마리의 사자가 탑을 받치는 가운데 비로사나불 좌상을 안치한 특이한 구조이다. 이러한 양식은 ‘화엄사 4사자3층석탑’이 대표적이다. 탑의 기단부에는 해서체로 10줄 79자가 쓰여 있어 탑을 만든 사연과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현재는 5층이지만 본래 9층탑이었음을 알 수 있고 충주를 ‘중주(中州)’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주변에서 청자 파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볼 때, 사찰에서 청자 생산이 이루어질 정도로 절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월악산 중턱에 자리 잡은 덕주사지가 나온다. 월악산! 『삼국사기』에도 언급되며 신라에서는 국가 제사를 올렸고 고려시대의 몽골 침입 시에는 월악산신의 도움으로 몽골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소사(小祠)를 올린 영산으로 알려진 산이다. 이곳에 덕주사가 있다. 덕주사 절터에는 절집은 없어진 채 마애불이 터를 지키고 있다. 보물 제406호로 폭 5.4m, 얼굴 길이 3.73m를 포함한 길이 14m, 귀의 길이만 하더라도 1.85m, 발의 길이는 7.5m인 규모로 11C 경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미륵리의 미륵사지 석불입상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설화를 더욱 실감나게 하고 있다. 법당 자리 동편의 거대한 화강암 남벽에 정면 바로 선 자세로 조각되었으며 조형 수법이 우수한 편은 못 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머리 부분의 양쪽 암벽에는 사각 형태의 구멍이 몇 군데 있는데 이는 조성 당시에 목조 전실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마애불 외에도 파괴된 불상 1구가 있고 일제 말 금구 및 범종 각 1좌 및 불기 몇 점이 출토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여 지금은 그 흔적을 볼 수가 없다.
덕주사 입구를 지나 계곡을 타고 더 내려가면 월광교 근처의 산록에 월광사 터가 있다.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어 극소수의 역사학자들만이 잡목을 뚫고 절터를 찾는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원랑선사탑비’도 이 절터에서 반출된 것이다. 아직 이 터에는 석재 및 축대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보이고 있으며 일부 석재는 부근 민묘의 호석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드러난 절터의 흔적을 미루어 볼 때 상당한 규모의 절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미륵사에서부터 출발하여 송계계곡 전체에는 불심으로 가득 찬 절골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