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A01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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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구 |
지릅재 를 힘들게 올라서서 심호흡 한번 한 후, 나무로 둘러싸인 고갯길을 천천히 내려오면 높은 산 밑에 웅크리고 있는 마을이 보인다.
아늑하다. 참 고요하다. 특히 겨울의 미륵리 입구는 적막하다. 마치 돌을 던지면 잔잔한 물결이 퍼질 것 같은 고요함이다.
그 입구 좌측의 조그만 뒷동산 밑으로 ‘중원미륵리도요지’라는 간판이 있는 건물이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고요함이다. 마치 완전 소외되어 누구 하나 돌봄이 없는 조용함이다. 이곳 가마터는 충청북도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총 4기의 가마터를 비롯하여 2기의 퇴적층과 1개소의 작업장 시설을 갖춘 계단식 오름칸 가마 구조로 가마의 축조, 불창 기둥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여러 종류의 백자가 출토되었으며 20C 전반기의 백자가마와 일본식 가마가 동시 발굴되어 한국과 일본의 도자문화 교류 상황은 물론 우리의 전통 가마 축조 방법과 자기 생산 양산 파악 등 도자기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호 가마는 아궁이와 9개의 자기를 굽는 방이 있으며 오름 가마에 일부 계단식을 절충한 가마이다. 경사가 있는 자연구릉에 외벽과 내벽을 이중으로 진흙과 돌을 섞어 축조한 전형적인 가마다. 2호 가마는 7개의 자기를 굽는 방이 확인되었고 구릉의 흐름을 이용한 오름칸 가마로 역시 흙과 돌을 섞어 만들었다. 3호 가마는 철화백자를 생산하던 오름가마로 굴뚝은 둥글게 안으로 좁아들어 중앙에 약간의 공간을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한 구조적 특징을 보인다. 4호 가마는 계단식 벽돌 칸 가마이다. 가마 벽의 유리질화로 볼 때 활동 기간이 가장 짧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퇴적층에서 나온 유물들은 한켠으로 모아 놓았다. 유물들을 정리해 보면 대체로 철화백자가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색상이 비교적 정갈하고 일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일반 생활 용기를 주로 생산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는 곧 자기 사용의 일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
이 도요지가 근대기에까지 활발한 생산 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마을 이름뿐 아니라, 주민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양재옥이나, 1930년생이신 김도진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여기서 생산된 그릇을 가마니나 볏짚으로 잘 동여매어 동창으로 가져갔다” 고 한다.
문화유산을 보호해야 된다는 명제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는 아니지 싶다. 창고형으로 지어 놓고 창살 너머로 쳐다보고 가라는 것인가? 좀 더 자세히, 많이 볼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유발된 흥미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기쁨을 누리는 공간을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 주변에는 조그만 가치 밖에 없는 것을 대단한 명품으로, 혹은 체험 공간을 꾸며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을 얼마든지 보고 있다. 이 도요지 하나로는 부족한 것인가? 미륵리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 이름이 무엇인가, ‘점말’이다. ‘점촌(店村)’, 즉 수공업을 주로 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촌’이란 것이 우리말로 마을, 이 마을이 줄여져서 ‘말’, 그렇다면 ‘점말’이란 ‘수공업을 주로 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여기서 수공업을 주로 하였다면 그 것은 곧 도자기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해방 전까지 마을에서 도자기를 생산했고, 또한 하늘재에 올라가는 중간에도 가마터가 남아 있어 자기 생산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곳의 주위는 풍화토가 잘 발달되어 백자의 원료인 백토가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즉 원료가 풍부하다는 뜻이다. 체험 공간을 만들어 얼마든지 관광자원화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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