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D0200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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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Poeun Jeong Mongju Seonsaeng |
영어의미역 | Master Poeun Jeong Mongju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양화 |
본관 영일(迎日)이며 자는 달가(達可)이고 호는 포은(圃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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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초상
초명은 몽란(夢蘭), 몽룡(夢龍)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영천(永川)에서 출생하였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다.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였다. 1376년(우왕 2)에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0년에는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에는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였고,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1389년(창왕 1)에는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고,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하였다.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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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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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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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신도비각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하였다. 또한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는 『포은집(圃隱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