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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명현 4인의 엇갈린 운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B03000206
영어음역 Gimyomyeonghyeon Sainui Eotgallin Unmyeong
영어의미역 Different Fate of Four Officials Involved in Purge of 1519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기와집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선영

사은정을 보수하여 고친 기록을 보면, 4인의 인연과 마지막 운명을 알 수 있다.

‘서로 의(誼)를 맺고 또 그 근처에 산소가 있는 언덕과 전원을 사이에 두고 지냈으며 한강 남쪽 용인 땅에 자리를 잡아 정자를 지으니 그 정자 이름이 사은정이다. 대체로 밭갈고 땔나무하고 낚시질하고 나물캐고 하는 네 가지 낙에서 취한 것으로 노년의 생활을 즐길 계획이었다. 또한 사현의 서로의 뜻을 아울러서 그 말씀과 글과 글씨와 편지가 다 없어지고 전하지 않으며 음애 선생이 최후에 돌아가셨으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귀향가시어, 돌아가실 때 외로움이 한이 되셨을 것이도다... 정암 선생은 정학으로서 여러 현인들을 불러일으키고 음애는 덕망으로서 조야에서 존중하였고, 회곡방은 두 분은 정암 선생의 사종이며 추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비록 잘 출세는 못하였고 또한 그 시대에 크게 행하지는 못했으나 물러가서 오히려 유학의 도를 강의하여 밝히고 이것을 모든 후생들에게 전하게 된 것이다... 제현들의 가르치심은 부모를 섬기는 일과 어른을 공경하는 데서 시작하여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는데 이른 것으로서 선생님과 벗에 도움이 되도록 하여 인의를 강습하므로 도학을 바탕으로 이를 숭상하므로 그 과나 복이 오는 것은 일찍이 절실한 것이 아닌 것이라는 계교이었으므로 꺾이고 패할수록 이름은 더 높아지고 없어지거나 흐려질수록 그 도는 더욱 빛나서 집에서는 그 말씀을 외우고 집집마다 그 가르침을 복종하니 천리가 맑고서 인심이 맑은 것이라 가는 곳에 잠깐 나타나서 의를 행하는 자에게 절실히 감화되는 것이 이와 같다. 처음 방은 기묘 이전에 있어서는 나타나지 않기를 어리석은 듯하였고 비록 정암이 조정에 있어 마침내 과를 혹 업게 된 때에도 어찌할 수 없었으니 가히 은자라 하겠다...’ 1988년에 후손들이 남긴 기록이다.

음애연보를 보면 중종 11년에 음애가 모친상복을 벗을 때쯤 정암·방은·회곡과 함께 서울에 있으면 만나지 않은 날이 없고 고향 용인에 가면 함께 꽃보고 쑥 태우고 놀아서 사은정을 짓고 평생을 함께 하려했다는 기록에서 조광조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데, 음애조광조의 급진적 개혁보다는 새로운 사회윤리와 통치질서 수립처럼 온건한 개혁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크게 보면 기묘사림에 속하나 조광조 세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한창 개혁논의가 일던 중종 11~14년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감사로 부임하면서 조정에 머무는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기묘사림의 핵심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죽음은 결코 관념적이지 않으며 현실적·정치적 승패를 초월한다. 역사를 통해보더라도 신념을 이루고 빛을 밝힌 인물들에 의해 인류는 유지되고 이어져온다고 할 수 있다. 정암 조광조의 삶과 마지막의 죽음이 항시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반면 음애는 기묘사화 이후 삭탈관직 된 이후 청주, 충주 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며 수많은 글을 남겼지만, 사화 후 불만을 술로 삭이는 날이 많았으며, 실의의 시기를 보냈다. 사학에 밝았던 역사에 대한 논평을 모은 『史評』의 저술에 정력을 기울일 뿐 문인활동이나 교우관계를 거의하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인한 네 명의 삶과 죽음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애한(哀恨)과 한숨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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