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40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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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沈亨求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장환 |
[정의]
경기도 용인 출신의 근대 서양화가
[개설]
운보 김기창 선생의 수제자인 심형구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여러 차례 특선을 하였으며, 이화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거쳐 1945년 이화여자대학에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학과를 설립하여 초대 학과장이 되었다. 이화여대 예술대학장과 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미국 아델피[Adelphi]대학 회화과 초청 교수로 9년 동안 재직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가계]
심형구(沈亨求)[1908년~1962년]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 율리마을 241번지에서 참봉과 경기도 광주군수를 지낸 심종협(沈鍾協)과 어머니 이협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교회 장로 였던 심원용(沈遠用)에게 양자로 입적하였으나 친 할아버지 심원택은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절도사를 지내는 등 대대로 무관 집안이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백암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을 했는데 일찍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형 심원구의 도움으로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활동 사항]
서울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양화 전공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인 동경미술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두 번 실패하고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데생 훈련을 거친 후 다시 응시하여 1931년에 입학하여 1936년에 졸업하였다. 심형구는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인 1935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출품하여 특선을 거듭하였고 1940년에는 심사위원 격인 추천작가가 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이 되었고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 미술학과를 설립하여 초대 교수 및 학과장이 되었고, 1948년에는 이화여대 예술대학장을 역임하였다. 부인인 성악가 김자경과 함께 미국에서 9년[1949년~1958년]간 머무르는 동안 뉴욕 아델파이대학[Adelphi University] 회화과 초청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미국 생활로 인해 화단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1958년에 귀국하여 이화여대 미술대학에 교수로 복직하고 동 대학 박물관장도 겸임하면서 국전 심사위원, 국전 초대작가 등으로 활약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활동에 의욕을 보이다가 1962년 8월 강원도 고성 화진포 초도리 쥐섬에서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익사하였다. 이처럼 심형구는 우리나라 최초로 이화여대에 미술학과를 설립하고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를 지내는 등 한국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저술 및 작품]
심형구의 작품경향은 사실적 자연주의로 일관하면서 인상파적인 시각을 근저로 한 서정적 분위기의 인물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수변(水邊)」[1938년], 「향원정」, 「포우즈」[1939년], 「피리소리」[1959년], 「학교있는 풍경」 등이 있다.
[묘소]
심형구는 그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 선산에 1999년 타계한 부인 김자경과 함께 묻혀 있다.
[상훈과 추모]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에 제15회 ‘선전’[1936년]에 「노어부」를 첫 출품하여 특선하였으며 다음해인 16회 ‘선전’에서는 풍경화 「해변」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940년 제19회에 출품한 「흥아(興亞)를 지키다」와 「소녀들」로 연속 특선하여 추천작가의 영광을 안았다. 1977년 문화화랑에서 미망인 김자경의 주선으로 심형구 회고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