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4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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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玉汝 |
이칭/별칭 | 임경재(任景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양화 |
성격 | 근대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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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
성별 | 남 |
생년 | 1872년 |
몰년 | 1907년 |
본관 | 풍천 |
대표경력 | 농상공부 주사 |
[정의]
구한말 용인 지역의 항일의병장.
[개설]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용인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3대 독립운동가문을 배출 했을 만큼 용인 지역은 항일투쟁의 선봉에 있었는데, 옥여 임경재 의병장도 대표적인 한일의병의 선구자이다.
[활동사항]
항일의병으로 양지군 주동면 평촌동[지금의 양지면 평창리]에 거주하였다. 본명은 경재(景宰), 대대로 무관장(武官將)을 지낸 풍천임씨의 후예이다.
1907년 (융희 원년) 희미해가는 정국을 개탄하고 동년 7월, 당시 이천군 신면(新面), 남정동(南井洞), 이근풍(李根豊)의 집에서 주창용(朱昌龍), 신규희(申奎熙), 조상현(趙常顯) 등과 봉기할 것을 결의하고 포군 32명을 모집, 의병대를 편제할 때 도총대장(都摠大將)에 이근풍, 군사(軍師)는 주창용이 되고, 임옥여는 좌익장(左翼將)이 되고 신규희는 우익장(右翼將), 김봉기는 진찰장(陳察將)이 되었으며, 조상현은 향관(餉官)이 되었다.
대오를 정비한 이들은 일약 출병하여 광주군 되고개에 이르렀을 때 도총대장 이근풍이 다른 참모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피살당할까를 염려하여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김봉기를 대장으로 하여 장두지(獐頭地:또는 노루목)에서 아침을 먹은 후 일본 기병대와 접전을 벌여 격퇴하였다. 그 후 이천, 광주, 용인,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크게 위세를 떨쳤던 바, 봉기한 이후 동년 5월 22일 이천읍 우편소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용인의 굴암사[지금의 묵리 용덕사]에서 일본 토벌대와 교전하였다.
그 외에도 죽산 백암시장[현, 용인]에서의 교전, 일진회원, 일본 순검 교상 등 혁혁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1907년 11월 10일 수원수비대에 체포되어 당년 36세 나이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일본군이 작성한 「폭도사편집자료」의 기록을 보면 그에 관한 활동내역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임옥여 : 전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 년 36세. 경기도 양지군 주동면(朱東面) 평촌. 경력불명
융희 원년 8월 중순 경성소요(京城騷擾) 후의 국운(國運)을 분개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이천 창의소(倡義所) 좌장(左將)으로서 횡포를 극하던 바 8월 21일 이천읍에서 일본기병(숫자 미상)과 교전하여 이를 격퇴하고 그 여세를 몰아 각처에 웅비(雄飛)하기에 이르렀다.
또 광주(廣州), 양근(楊根) 등을 배회하고 이천읍에 들러 융희원년 8월 30일 다시 일본군과 접전, 부하 2명의 전사(戰死)를 내고 패주한 바 있다. 그 후 포군 12명을 인솔하고 광주군 실촌면(實村面)에 이르러 원주의병대장(原州義兵隊長)의 군략(軍略)을 사용하였다. 시 포군 70여명을 모집하고 굴암[지금의 이동읍 묵리 용덕사]에서 일군과 접전, 사망자 수명을 내고 둔주(遁走)하였다. 또한 융희원년 9월 14일 포군 1800명을 인솔하고 안성을 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의하여 격퇴 당하였다. 그로부터 포군 39명을 인솔하고 양근군(楊根軍)에 들러 수일동안 체제, 죽산군 원일면[지금의 원삼면]으로 행진중 고초곡(枯草谷)에서 일본군 병사 및 순사대(巡査隊)와 교전후 패전하였다. 이때 패병 33명을 용인의 두두마고개 산위에 집합시켜 무운(武運)이 비색함을 타이르고 한때 해산하였다.
이상의 폭거중 광주 상림(尙林) 도중에서 일진회원(一進會員) 4명, 백암시장에서 1명, 또 죽산군 백암에서 순사 1명, 순검 1명을 총살하였고, 또 죽산군에서 순검 1명을 생매장한 일이 있었으며 한때 정주원(鄭周源)과 함께 횡포를 극한바 융희 원년 11월 자택에서 수비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죄상을 자백받고 드디어 총살당했다.
[상훈과 추모]
용인문화원장을 지낸 고 박용익 선생의 노력으로 1990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고향인 평창리 마을 입구에 용인시민의 정성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동상이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국사편찬위원장인 박영석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