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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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炳春 |
영어음역 | An Byeongchun |
영어의미역 | An Byeongch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인섭 |
성격 | 노동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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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 |
성별 | 남 |
생년 | 1910년 |
몰년 | 미상 |
[정의]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비평가 및 노동 운동가.
[개설]
안병춘은 1910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에서 6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홀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서울 영등포로 올라갔다. 6·25 전쟁 직후 행방 불명이 되어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활동사항]
안병춘은 늦은 나이에 영등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세가 되던 1928년 3월에 졸업한 후 양조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중에 잠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학관에서 고등과 공부를 하지만 생계를 위해 보성고등보통학교에 급사로 들어갔다. 당시 유행한 사회주의 열풍 속에 급사인 그도 학생들과 함께 독서회에 가담해 1931년 8월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1930년대 한국 문학의 큰 흐름을 이루었던 카프 문학의 맹장으로서 수많은 트로이카를 주도하며 일제의 지배 체제에 항거하였다.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이재유의 충고에 따라 1933년 3월 영등포에 있던 용산공작주식회사 영등포공장에 취업하여 같은 해 9월에 파업을 주도하는 등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나선다.
1933년 하반기 파업 투쟁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강력한 탄압과 검거에 돌입하였는데, 이현상·안병춘을 포함하여 1차 경성트로이카 사건에서 피검된 관련자만 무려 2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김삼룡과 함께 체포된 안병춘은 살인적인 고문을 당한 끝에 1935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형기는 2년이지만 수사 기간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3년의 수형 생활 끝에 1937년 초에 석방되었다.
1942년경 평범한 여성 한상운과 결혼하였는데, 이때는 이관술·박헌영·김삼룡 등이 모두 구속되거나 수배되어 일제하 최후의 사회주의 저항 단체이던 경성콤그룹마저 붕괴된 시기였다. 결혼한 안병춘은 대부분이 그랬듯이 생계를 위해 전향서를 제출한 것으로 보이며, 일제의 알선으로 제약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