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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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陽智縣重修東軒記 |
영어음역 | Yangji-hyeon Jungsu Dongheongi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순석 |
성격 | 기문(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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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안국(金安國)[1478~1543] |
창작연도/발표연도 | 1532년(중종 27) |
[정의]
1532년(중종 27) 김안국이 지은 양지현 동헌 중수 기문(記文).
[개설]
『모재집(慕齋集)』에 전하는 작품으로, 권렴(權㻩)이 양지현(陽智縣)의 동헌(東軒)을 중수하고, 김안국(金安國)[1478~1543]에게 부탁하여 받은 기문이다.
[내용]
“양지는 작은 고을이다. 경기 안에 예속되어 공물이 많고 부역의 번거로움이 다른 도의 배나 된다. 땅이 좁고 사람이 적으며, 아전과 노비들은 보잘 것 없어 고을의 명목을 지킨다고 하나 지탱해 나가지 못할 이유가 있다. 경상·충청 두 도를 왕래하는 요충지로, 공사간의 여객들이 모이는 곳이며, 해물이나 내륙 물자를 수송하는 요지이며, 이웃나라 일본 사신들의 예물이 모두 집합되어 수송됨에 여가가 없고, 그들을 접대함에 다른 일에는 돌아볼 여유가 없다. …(중략)…
권렴이 …(중략)… 양지현의 원임으로 부임하여…(중략)… 퇴락한 객관 서남쪽에 있는 두 행랑과 관청의 창고, 청사 같은 것을 차례로 보수한다든지 혹은 개축하고 혹은 기와를 갈아서 급히 보수할 것과 힘에 미치는 바를 헤아려 일을 하니 모두 백여 칸이나 되었다. 다시 객관의 동헌을 개축하려고 함에 옛 규모보다 크고 넓게 하려 하였으나, 일이 너무 큰데다가 흉년까지 들어 시작하기에 힘들고 벅차 근심에 잠긴지 오래였다.…(중략)…
1532년 2월에 시작하여 4월에 끝내니, 일을 시작하여 마친 기간이 겨우 석달이었다. 백성들은 수고로움을 알지 못하였고, 관에서는 큰 비용이 나지 않았음에도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니, 청사는 다섯 칸이었다. 뜰에 쌓은 돌도 모두 바꾸어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고, 집터도 잘 다듬었으며, 화려하게 단청하고 넓게 꾸며서 예전의 청사와는 완연히 달랐다.
또 동헌의 동쪽 모퉁이에는 따로 조그마한 집을 짓고, 집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을 끌어다가 네모난 못을 만들었는데, 맑고 깨끗하여 밑바닥까지 보였다. 오래 묵은 은행나무는 커서 큰 구름처럼 그늘을 만들고, 못가에 서서 못을 가렸으며, 양휘당(陽暉堂)은 사면이 통하여 바람이 불어오면 막힘이 없어, 시원스럽고 상쾌하여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기에 좋고, 또 따뜻한 방도 만들고, 서늘할 때를 대비하여 공인(工人)에게 시켜 모두 갖추게 하였다. …(중략)…
권후가 나에게 편지를 하여 소당(小堂)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주자의 관서절구(觀書絶句)의 뜻을 취하여 청감헌(淸鑑軒)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陽智小縣也 隸於畿內 供獻之果多 賦役之煩 倍蓰他道 地挾民少 吏隸彫殘 雖號能守 有不能支加之處 慶尙忠淸兩道 往來之衝 公私賓旅 輪蹄之所 走集水陸包貢 方物之所轉輸隣邦聘价 擎珍輦琛 充庭實之品 咸輻輳 無虛日 館接應酬之不暇 遑急於他乎 …(중략)…安東權候㻩…(중략)…初赴任…(중략)…客館之西南兩廡 曁縣官廳倉庫衙舍 以次繕 或改構 或補葺 量其修之緩急 力之所及 其爲之 幾百有餘間 復凝重營客官之東軒 頗欲拓其舊規 而開廣之 爲其功鉅 而時屈重於興工 沈吟者久之…(중략)…起功於壬辰仲春 訖役于孟夏 首尾僅四月 民不知勞 官不傷費 而事自集軒成 爲楹者五 易築砌礎 皆用鍊石 位置嚴整 丹雘煥焉 敞豁恢廓 興前宇逈殊 復於軒之東隅 別構小堂 堂下引淸澗爲方塘 泂澈見底 古鴨脚樹 大參雲蔭蔚 塘邊蔽翳 陽暉堂四面泂虛 風來無礙 瀟灑爽郞 尤宜朱夏却炎 亦有溫房 兼備凉…(중략)…候適以書來 請小堂之名 余取朱子觀書絶句意 名之曰淸鑑軒).”
[의의와 평가]
이 기문을 통하여 조선 전기 양지현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으며, 관아의 규모와 부속 건축물의 현황을 살필 수 있다. 구체적인 예로, 백여 칸 규모의 청사와 객관, 동헌 주변에 있었던 양휘당과 청감헌 등의 정황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양지현관아도(陽智縣官衙圖)」와 함께 소중한 문헌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