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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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左田-由來 |
영어음역 | Jwajeon Gogaeui Yurae |
영어의미역 | Origin of Jwajeon Pass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효림 |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에 좌전고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좌전고개의 유래」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포(朴苞)[?~1400]와 관련되어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박포는 조선 전기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의 조전절제사로 전공을 세워 죽성군에 봉해지고 중추부지사가 되었으나, 상작이 낮다고 불평하여 이방원의 미움을 사서 죽주에 유배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던 중, 태조의 4남 이방간(李芳幹)과 5남 이방원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반목을 기화로 이방간을 충동질하여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을 일으켰다가 이산(尼山)에 유배된 뒤 참수되었다.
[채록/수집상황]
1983년에 외사면 백봉리에 사는 박규환이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1985년에 출간한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하였다.
[내용]
조선 정종 때의 무장이던 박포는 일찍이 정도전의 난 때에 이방원을 도와 큰 공을 세웠으나 그에게 돌아온 논공의 대가는 보잘 것이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박포는 여러 사람에게, “이무(李茂)가 비록 정사(定社)의 반열에 참여하였으나 그 공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변덕이 많아 측량하기 어렵다.”라고 비방하였다.
이방원이 이 말을 듣고 임금에게 아뢰어, 박포는 당시의 죽주(원삼면 좌항리)에서 귀양을 살게 되었다. 당시 박포의 벼슬이 좌찬성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좌찬성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곳을 좌찬리라 부르고, 박포가 넘어갔다는 마을의 고개를 좌찬현(좌찬고개)이라고 하였다. 이 좌찬현이 변형되어 훗날 좌전고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박포는 얼마 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기는 했으나 은근히 이방원을 원망하던 차에 회안군 이방간의 집으로 찾아가서 장기를 두게 되었다. 마침 이날 아침에 우박이 쏟아졌는데, 이를 보고 이방간에게 “겨울비가 길을 파손하면 병사가 시가에서 교전한다고 하니 조심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때 하늘에 붉은빛의 기운이 나타난 것을 보고 또 방간에게, “하늘에 요사한 기운이 있으니 조심하여 처신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이방간이 이에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박포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정안군의 군사가 날로 강성하며 많은 무리가 붙어 공의 위태함이 날로 높으므로, 먼저 선수를 써서 이들을 쳐부수어야 합니다”라고 충동하여 마침내 거병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방원의 군사에게 패한 후 이방간은 토산으로 귀양가고, 박포는 선동죄로 참수되었다. 그후 향리에 장사하였으나 한때 실종된 것으로 전해졌던 박포의 묘소는 현재 백암면 백암리에 전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좌전고개의 유래」는 좌찬성을 지냈던 박포가 유배를 살기 위해 넘어가던 고개에 박포의 관직명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담이다.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의 경우 역사적 인물이 유배를 가거나 한 지역을 거쳐 가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비범함이 과장되거나 신성시되면서 나온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