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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립 정려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912
한자 柳復立旌閭記
영어음역 Yu Bokrip Jeongnyeogi
영어의미역 The Chronicle of Memorial Shrine for Yu Bokrip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순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문|정려기(旌閭記)
작가 이재(李縡)[1680~1746]
창작연도/발표연도 1746년(영조 22)연표보기

[정의]

1746년(영조 22) 이재가 지은 임진왜란 의병장 유복립의 정려기.

[개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유복립(柳復立)[1558~1593]에게 정려의 은전이 내려지자, 후손 유심(柳深)의 간청으로 이재(李縡)[1680~1746]가 지은 정려기(旌閭記)이다. 글씨는 이조참판 신만(申晩)이 썼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에 있는 유복립 정려각 안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내용]

임진왜란 때 순절한 유복립(柳復立)의 충정을 널리 표양(表揚)하기 위한 칭송의 글로, 유복립의 가계(家系)와 진주성전투의 간략한 전말, 정려의 은전이 내려지기까지의 경위 등을 서술하였다.

"슬프다. 이것은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유복립의 정려이다. 공의 자는 군서(君瑞)로 완산 사람이다. 세종조의 명신인 의손(義孫)의 후손이다. 일찍이 벼슬하여 종부시 주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경상우감사로서 진주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공은 그곳에 가서 그를 모시며 계획에 도움이 많았으며, 누차 싸움에 승리하였음을 알리었다. 학봉이 죽자, 적병은 더욱 쳐들어 왔다. 계사년(癸巳年, 1593) 6월 29일 성을 지킬 수 없게 되자, 공은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죽었다. 나이 36세였다.……(중략)……

지금 임금[英祖] 기유년(己酉年, 1729)에는 또 그 가문에 정려를 내리었다. 공의 어머니는 학봉의 누이이다. 인조 임금 때 일찍이 그의 정절을 표창한 바 있으니, 공의 충정은 다 그 말미암은 바 있다.……"(하략)

[의의와 평가]

유복립의 충정과 함께, 유복립의 모친이요 김성일(金誠一)의 누이인 김씨 또한 정절이 뛰어나 표창된 바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문을 지은 이재가 용인의 대표적인 학자라는 점도 의미를 보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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