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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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丹寺址 |
영어음역 | Geumdansaji |
영어의미역 | Geumdansaji Archeological Site |
이칭/별칭 | 어비리사지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 산99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엄익성 |
성격 | 절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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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통일신라~조선시대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 산99 |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 절터.
[개설]
어비리 이동저수지에 수몰된 금단사지에 대한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마을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어비리 높은재[금단골]에 금단사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다고 한다. 폐사된 금단사의 유물들을 어비리 주민들이 수습하여 봉안하고 어비울절[금단사지 하단 300m 지점]을 짓고 치성을 드렸다 한다. 1963년 이동저수지 조성으로 수몰되기에 이르자, 절터에 있던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3호)과 석불좌상을 옮겨 지금의 동도사(東度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저수지의 물이 빠지면 절터에 남아 있는 초석과 기와편 등이 보인다.
[위치]
금단사지는 이동저수지 제방에서 호수 쪽을 향한 채 서쪽 산[높은재] 하단부에 위치하여 수몰되지 않았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1977년 간행된 『문화유적총람』에는 “높이 약 3.3m 삼층석탑 1좌와 초석 10여 개가 있었는데, 1963년 저수지 공사로 수몰되면서 탑은 동도사로 옮겨 복원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석탑도 도괴되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그 부재를 모아 원래의 자리에 세웠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삼층탑은 2회 이상 해체·복원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967년 동도사로 탑을 옮길 때에 석탑 내부에서 토제삼층소탑(土製三層小塔) 1점과 청석제향로(靑石製香爐) 1점이 발견·신고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유물 번호: 新2193, 2194).
석탑에서 발견된 이들 유물들은 소탑(小塔) 공양의식(供養儀式)에 의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사리장엄의 특징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금단사의 창건 연대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 동도사에는 금단사지에서 옮겨온 팔각대좌, 석등 간주석, 석등 하대석, 연화대좌 등이 있다.
[현황]
금단사지에서 옮겨온 석불좌상에 나타난 대좌(臺座)의 복엽형(複葉形) 연화문 양식은 대체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다른 조성 예와 유사하다. 또 삼층석탑에 나타난 이중 기단구조와 1층 옥신(屋身)에 별도의 받침을 두는 점, 그리고 크게 휘는 옥개석의 낙수면 처리 등은 통일신라 시기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금단사는 절터에 잔존하던 주요 석조물들의 조성 양식과 석탑에 봉안되었던 소탑 등으로 보아 대체로 10세기 전후부터 존속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금단사의 유물들은 동도사로 이전 봉안되어 있고, 금단사라는 사명은 남사면 방아리에 새로 창건된 절 금단사로 남아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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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4 | 행정지명 현행화 | 이동면에서 이동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
2012.01.06 | [개설] 수정 | 1) 구전에는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어비리 높은재[금단골]에 금단사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다고 한다. 2) 이 곳에 1950년경 신흥사라는 법당이 들어섰다가 ->폐사된 금단사의 유물들을 어비리 주민들이 수습하여 봉안하고 어비울절[금단사지 하단 300m 지점]을 짓고 치성을 드렸다 한다. |
2012.01.06 | [위치] 수정 | 3) 이동저수지에 수몰되었으며, 어비리 옛 ‘막골’ 서쪽에 해당한다. ->이동저수지 제방에서호수 쪽을 향한 채 서쪽 산{높은재]하단부에 위치하여 수몰되지 않았다. |
2012.01.06 | [현황] 추가 | 현재 금단사의 유물들은 동도사로 이전 봉안되어 있고 금단사라는 사명은 남사면 방아리에 새로 창건된 절 금단사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