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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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澄 |
영어음역 | Lee Jing |
이칭/별칭 | 양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양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은숙 |
[정의]
조선 전기의 종친.
[개설]
이징은 태조의 조카이며, 고려 때부터 벼슬에 나아갔지만 주로 활동한 시기는 태종과 세종대이다. 본래 풍질이 있어 이로 인해 죽었다. 아버지가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태종을 도와 난을 진압한 공이 있었고, 이징도 태종대부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일생에 세 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외교적인 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이다.
[활동사항]
이징이 태어난 때는 고려 우왕대이다. 1387년(우왕 13) 13세의 나이로 산원(散員)이 되고 낭장(郞將)·장군(將軍) 등을 거쳐 태종 초에 원윤(元尹)이 되었다. 1412년(태종 12) 우군도총제(右軍都總制)로서 우일번절제사(右一番節制使)와 별사금제조(別司禁提調)를 겸직하였다.
그 이듬해인 1413년에 전성진병마사(篿城鎭兵馬使)가 되었다. 1414년(태종 14) 도총제(都摠制)로서 진하부사(進賀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17년(태종 17)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거쳐 1418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서 삼번절제사(三番節制使)가 되었다. 1419년(세종 1)에 이조참판(吏曹參判) 허지(許遲)와 함께 표전(表箋)을 받들고 북경에 가서 상서(祥瑞)를 하례하였다.
1423년(세종 5)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경상좌도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使)가 되었으며, 1425년(세종 7)에는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에 임명되었다. 1426년 중군도총제로서 절일사(節日使)가 되어 재차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7년(세종 9) 도총제로서 황주선위사(黃州宣慰使)가 되었다.
1429년(세종 11)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가 되어 사은정조사(謝恩正朝使)로서 또다시 명나라에 가게 되니, 임금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하절일표(賀節日表) 및 사은표·전(謝恩表·箋)을 배송하였다. 이듬해 올 때 사냥을 했다 하여 이산(尼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우군부판사(右軍府判事)·중추원판사(中樞院判事)·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양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온량(溫良)하여 즐거움을 좋아함이 양(良)이고, 관락(寬樂)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이 정(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