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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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應洙 |
영어음역 | Min Eungsu |
이칭/별칭 | 성보(聲甫),오헌(梧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광 |
[정의]
조선 후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보(聲甫), 호는 오헌(梧軒)이다. 증조부는 민광훈(閔光勳), 할아버지는 민시중(閔蓍重), 아버지는 이조판서 민진주(閔鎭周)이다. 외조부는 정상징(鄭尙徵), 부인은 조태동(趙泰東)의 딸이다.
[활동사항]
1710년(숙종 36)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715년에는 주부·정랑에 올랐다.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사직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다시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정랑과 정언 등을 거쳐서 1726년에는 헌납에 임명되었다. 다시 사간을 거치고 이듬해에는 교리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파직되었다.
그후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호서안무사(湖西按撫使) 김재로(金在魯)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이때 군기를 엄정히 하는 등의 공로를 세우면서 동래부사(東萊府使)에 나갔다.
1729년에는 충청도감사로 나갔으며 이듬해에는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731년에는 대사간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부제학에 전임되었다. 그러나 1년 뒤에 출척되어 죽산부사로 좌천되었는데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1732년에 다시 강화유수에 임명되었고, 1733년 6월 사은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에 선발되었으며, 10월에는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동지사행을 수행하면서 나라를 욕되게 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6월에 복직되었으며, 8월에는 대사성에 올랐다.
이후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병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 때 이광좌(李光座)와 조태억(趙泰億)의 관작 추탈(追奪)을 상소하다 면직된 채 죽었다. 1748년부터 1750년까지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충렬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저술 및 작품]
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이 높았고, 대구에 있는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의 비문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