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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380
한자 義兵
영어음역 Uibyeong
영어의미역 Righteous Arm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조준호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국가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조직했던 자위군.

[개설]

의병이란 나라 안에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民軍)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의병들의 활동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역대 항중·항몽·항청·항일의 투쟁 속에서 무력이 강한 국민성을 갖게 되었고, 어느 침략자로부터도 정복당하거나 굴복하여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고 평가받는다. 용인의병이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고려 후기 대몽항쟁기와 조선 말기였다.

[대몽항쟁기]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 대륙은 북방민족들이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면서 국가를 건설하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정세를 좌지우지하였다. 송나라가 요나라와 금나라에 굴복하고 고려가 금나라에 사대의 예를 표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몽고는 고려에 장장 80여 년에 걸쳐 일곱 차례에 이르는 침입을 자행하였다. 몽고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핑계삼아 1차 침입을 자행한 몽고는 고려를 철저히 유린하였으며, 화의가 맺어진 이후에도 무리한 조공 요구를 계속했다.

이로 인해 고종은 수도를 강화로 천도하면서 몽고로부터 왕실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몽고는 이것을 반역으로 간주하여 1차 침입 때 공을 세운 살리타를 앞세워 2차 침입을 하게 된다. 이때 남진하던 몽고군은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세화(李世華)가 이끄는 광주 주민의 항전에 밀려 광주를 포기하고 남하하다, 현재 용인시에 위치했던 처인부곡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김윤후(金允侯)를 따르는 부곡민과 인근 백성들의 활약으로 적장 살리타는 사살되고, 실질적으로 몽고의 제2차 침입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역사 기록으로 보면 김윤후가 단독으로 살리타를 활로 사살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상 김윤후의 단독 행동이 아니라 처인 부곡민을 포함한 민중들이 단합된 힘으로 이루어낸 승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

1. 제1차 용인의병

청일전쟁 이후 중앙 정국의 동요 속에 국가 전체가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1895년(고종 32)에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유생들이 중심이 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국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민중 봉기는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용인에서도 1896년(건양 원년)에 일제가 주도한 단발령과 일련의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의병활동이 전개되었으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그 해 말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면서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2. 제2차 용인의병

제1차 의병이 일어났던 시기에 비교적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용인 지역에서는, 융희 원년(1907) 7월경에 이르자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활발한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다. 조직과 면모를 갖춘 부대만도 임옥여(林玉汝) 의병부대·정주원(鄭周源) 의병부대·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가 있었고, 용인 출신이면서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던 사례도 있었다.

먼저 임옥여 의병부대는 20~70명 내외로 구성되어 관료(상공부 주사) 출신인 임옥여가 실질적으로 부대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주로 1907년(융희 원년) 7~9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고, 일본이 장악한 관공서 습격 및 일제에 협조한 조선인의 처단에 주력한 것으로 파악된다. 같은 해 11월 임옥여가 피살당하면서 부대활동도 종식된 것으로 보인다.

용인군양지군 일대에서 약 15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활동하던 정주원 의병부대는 초기에는 조직 확대에 주력하여 한때 9백여 명의 부대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정주원은 1개 중대를 인솔하고 나머지는 부하에게 맡겨 양지·죽산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1908년(융희 2) 2~4월 사이에 일본군과의 교전 및 친일 부호 등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는데, 같은 해 7월 정주원이 피살되면서 활동이 종식된 것으로 보인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모현면 출신인 이익삼이 주도하여 1907년 말에 조직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현 친일정부를 전복시키고 일본인을 국경 밖으로 몰아냄으로써 국권 회복과 선정을 베풀고자 한다”는 확실한 봉기 이념과 목적을 갖고 활동했다. 1908년 초부터 1909년 6월까지 지속적으로 용인군 북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이익삼 의병부대는, 군자금 모집과 토지조사사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측량수(測量手, 측량하는 사람)에 대한 응징에 주력했다. 이들은 1909년 말 이후 활동이 중단되었는데, 이 역시 지도자의 피살 때문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용인 지역에서는 농업·수렵·상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던 의병들이 의병대를 조직하여 관아 습격과 일본군과의 전투, 군자금 모집, 친일파 응징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그 시기는 주로 1907년에서 1909년까지 3년 기간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의의와 평가]

용인 지역에는 유현(儒賢)이나 승려, 이름없는 민초를 가리지 않고 나라를 위해 스스로 싸웠고, 의병의 규모에 관계없이 역사상 빛나는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었다. 이것은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고 중요한 서원들이 분포하고 있는 용인 지역의 역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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