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D04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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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제연 |
[“열일곱살때까지 농사일을 안해봤어. 두 형님이 나를 키우셨지”]
열일곱살에 중장리로 들어왔다. 그해가 1942년. 해방되기 직전이었다. 원래 고향은 충청북도 옥산이었는데, 선비로 사셨던 아버지는 나라가 일제치하에 들어가자 1934년에 고향을 떠나 10승지지로 알려져 있던 공주로 오셨다. 일곱 살부터 10년간 살았던 동네는 이인면 잣골로, 두 형이 이인에 있던 금광산에서 일을 하며 집안의 생계를 이어갔다. 형들 덕분에 어려서는 직접 고생하는 일 없이 살았던 것 같다.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일본 놈들로부터 일본글을 배우게 할 수는 없다며 극력 반대하시는 바람에 한문을 조금 배우다 말았다.
그러다 열일곱살 때 온 가족이 중장리 갑산수마을로 들어와 집 한칸을 얻고 정씨네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시작했다. 해방되기 전까지는 일본 사람들 등살에 살기가 힘들었다. 농사를 지으면 거의 다 공출해 가고 깻묵과 강냉이 따위를 배급해주었는데 도저히 살기가 힘들어서 추수를 하면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었다. 그놈들은 멋대로 남의 집을 들락거리며 숨긴게 없나를 확인하곤 했는데 사람들이 식량 등을 땅에 묻는다는 것을 알고는 꼬챙이로 땅바닥까지 쑤시고 다녔다.
“그눔들이 꼬챙이를 들고와서 땅바닥을 쭉 훑어봐. 그리고 바닥을 건드린 것처럼 보이면 꼬챙이로 막 쑤셔보는거지. 그러다 꼬챙이에 딱! 하고 단지 뚜껑이 걸리며 큰일나는겨. 땅 파서 다 꺼내지. 그렇게 걸리면 개죽음 당하는겨. 아주 그렇게 징한놈들이 없다니께. 산에다 도토리나무 심고 그거 따 먹으면서 전쟁한다고 했던 놈들이 아녀. 하긴 뭐.. 더 나쁜 놈은 앞잽이들이지. 그놈들이 더 지랄이여...” 일본인과 그 앞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들이 나타나면 남자들은 산으로 도망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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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삼영 씨
[“해방후의 고생은 고생이 아녀”]
먹을게 없어서 이것저것 가져다 맷돌에 넣고 갈아서 끓여먹었다. 농사지으면 소작료가 반이 넘고, 일제에 공출당하니 죽지못해 산다고 할 정도였는데 중장리에 온지 두해만에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이 되어서 제일 좋은 점이 무엇이었나요?” 라는 물음은 헛된 말이었나. “허허.. 해방되니 당연히 좋지. 해방되면서 다 부자가 된겨. 토지분배할때에 상환곡 넣고 땅을 차지했잖아. 도지를 안내도 되니 얼마나 좋아. 살기 좋지. 땅 차지해서. 거기다 일본 압제 않받으니 좋고, 그눔들이랑 앞잽이랑 들락거리는 꼴 안봐서 좋고 자유 생겼고... 그때 고생을 하도 해서 그런지 해방하고나서 고생한건 고생이 아닌 것 같더라구.. ”
[미군 폭격에 몰살당한 인민군]
해방의 기쁨도 잠시 6·25 한국전쟁의 발발로 다시 한번 세상이 들썩였다. 계룡산 아래 중장리는 워낙에 피난처로 유명한 곳이었으니 굳이 동네를 떠나 피난갈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산에 숨어있는 날이 많았다. 공주시내에 사는 사람들도 파난을 왔다. 옆동네인 내흥리나 하대리에서 ‘지방빨갱이’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고, 중장리 사람들은 그런 일보다는 인민군이 남하할때에 몇몇 유지가 죽음을 당하기는 했다. 전쟁이라고는 해도 농사도 짓고 당산제도 지냈으니 큰 일은 없었던 셈이다.
인민군이 계룡산에 숨어 들어갔을때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을 보고 크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미군은 중장 2리의 농바위 옆에 포대를 설치하고 산속에 폭격을 퍼 부을 계획이었는데 천년고찰 갑사를 살리기 위해 포기했다. 그때 미군이 어딘가에 무전을 하는 것 같더니 곧 비행기 네 대가 나타나 계룡산에 포를 쏴대기 시작했다. 그날 밤 동네 사람들은 집에서 밖을 보며 한참 구경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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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2리 농바위
“미군이 용하긴 용해. 인민군이 밤에만 다니는걸 알고, 걔들이 갈 장소를 미리 알아내고 거기다 폭격을 하더라고. 하늘에서 탄피가 막 떨어졌는데 동네 애들은 그걸 엮어서 뭐 한다고 그걸 주으러 다녔어. 그래도 다치지는 않았어.”
계룡산에 있던 인민군은 완전히 전멸을 했다. 산속에는 송장이 말도 못하게 많았고 한동안 나무하러 갔다가 질겁해서 내려오는 경우가 잦았다. 몇 년이 지나고 어떤 고랑에서 돼지감자가 엄청나게 잘 자라 팔뚝만한것을 잔뜩 수확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고랑통은 인민군 송장을 한꺼번에 묻었던 장소였다. 작대기로 땅을 헤집으면 인골이 우르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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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바라본 계룡산
[사랑방 TV가 동네 극장]
스물 다섯 살 노총각 곽삼영씨는 금대리에 사는 밀양박씨가의 열여섯살 처녀와 결혼을 했다. 당시에 남자가 18세 정도면 결혼을 했으니 늙은 총각이었던 것이다. 가난했어도 양반집안의 자부심이 있던 아버지가 좋은 가문의 처자를 찾느라 결혼이 늦어졌다.
“우리 아버님이 양반이셨어. 집은 무지하게 못살았는데. 옥산에서는 양반이라고 유명했어.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여기저기 알아보셨대. 내가 하고 싶다고 장가가고 그렇게 되는게 아니거든. 좋아하는 동네 처녀가 있었냐구? 몰라. 생각 안나. 허허. 아버님이 알아보신게 저짝 저수지 아래에 금대리 있잖여. 하루는 갑자기 장인이 될 분이라면서 어떤 사람이 왔어. 미리 집으로 찾아와 얼굴을 보고 사주를 받아간거지.
혼례는 금대리에서 처가에서 했어. 색시 얼굴을 보니까 거 되게 앳되보이대. 나보다 한참어렸어. 지금으로 치면 노총각이 중학생이랑 결혼한겨. 그치? 하룻밤 자고, 다음날에 말이 끄는 달구지 타고 집에 왔어. 가까운 동네라 걸어다닐만 했는데, 어떻게 혼례치르고 걸어오나.”
그때까지 집안을 위해 고생하는 형님들을 대신해 부모님은 직접 모시기로 마음먹고 돌아가실때까지 부모님과 살았다.
1960년대에 노모의 건강이 위태로워지자 형님은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텔레비전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큰 돈을 들여 그것을 사왔다. 그때만해도 공주-논산간 도로에서 갑사까지 가는 길이 넓기만 할뿐 포장이 안되어서 비가 왔다하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TV를 사오던 날에도 땅이 질어 짐을 실은 달구지가 못 들어오자 중장3리 갑골마을에 맡겨놓고 다음날 다시 끌고 왔다. 중장리에서 세 번째로 TV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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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텔레비전 삼매경에 빠진 주민들
TV를 사랑채에 내놓으니 매일 사람들이 몰려왔다. 같은 동네에 이미 TV를 샀던 집에서는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집주인 노인이 인파에 밀려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혀 죽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곽삼영씨 집도 TV보러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랑채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옥녀’라는 드라마가 인기 있을때엔 집에 불을 피웠다가 불씨가 번져 불이 났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넋을 놓고 TV만 보고 있느라 창고 한 채가 완전히 타버렸다.
[고향 떠나기 싫어]
3년전 아내와 사별하였다. 1남 4녀는 모두 외지에 나가 사는데, 아들도 얼마 전 세상을 떠 이제는 며느리와 손자, 손녀 그리고 네 딸이 있다. 모두가 수원, 부천, 인천 등 먼 곳에 사니 자주 보기는 힘들지만, 딸들이 밑반찬을 챙기며 혼자 있는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한다. 한때는 외롭기도 하고 딸들 성화가 만만치 않아서 한동안 도시 사는 딸네 아파트에서 몇 개월 살기도 했다. 그때 아침마다 아파트 노인회관에 갔는데 그 동네 노인들과는 어색해서 아무래도 어울리기 쉽지 않았다. 그럴때면 장터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동네 뒷산을 산책하다 다시 돌아왔다. 산책로까지 어찌나 잘 만들어놨는지 감탄을 많이 했다. 이상하게 깨끗하고 따뜻한 아파트에 있어도 답답하기만 했다.
“회관 노인네들도 다 재밌고 자식들 맨날 보니 좋긴 한데, 자꾸 현기증이 나더라고... 참 이상하대... 젊을때엔 서울에 가면 재밌었는데...”
결국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낡고 오래된 집이 편하고, 시원하게 펼쳐진 동네 풍경이 좋고, 길에 나가면 항상 만나는 얼굴이 반갑다. 몇 달 떠나보니 정말 고향이 좋은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