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D02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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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을경 |
일제강점기의 신문을 뒤져보면 갑사와 관련한 기사들이 주목된다. 현재 마을에 거주하는 80세 이상의 노인들이 어린 시절인 해방 이전의 마을 모습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사적인 일에 제한되어 있어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한 신문기사를 통해 80여년전 갑사에서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해 보자.
[고아를 보살핀 여인]
동아일보 1924년 9월 22일 “계룡산 갑사에 복덕월의 자비”
복덕월이란 법명을 가진 40여세 된 여인 이한열(李漢烈)씨가 1919년 무렵 갑사에 들어왔다. 가족관계가 어떠하였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재산이 많았던 듯, 재산을 털어 갑사 팔상전을 중수하고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부모없이 걸식하며 떠돌던 고아들을 하나 둘씩 데려다 보살피게 되었는데 그렇게 모인 고아는 금방 4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고아원을 만들 결심을 하고 자신의 소유지에서 추수한 150석의 곡식을 고아원의 기본 재산으로 조성하고는 법원에 재단법인 등기를 냈다. 그녀의 자비로움은 이에 그치지 않았고 1931년 12월에 총독부에서 사업비 350원을 받게 되자 소작인들에게 지세를 본인이 직접 부담하겠다는 통지를 보낸 후 350원을 소작인에게 분배하여 주기도 하였다. 마을의 노인들은 지금도 자선가였던 복덕월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녀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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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9월 22일, 복덕월 관련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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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팔상전
[갑사를 찾는 사람들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다.]
시대일보 1926년 7월 12일 “계룡산 갑사, 내왕객 비난성(非難聲)”
갑사를 찾는 관광객이 많았던 것은 1926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갑사는 워낙 유명한 사찰이라 사계절 관광객이 많아 하루에 30~40명에 이를 정도였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 그정도 숫자의 관광객은 대단한 일이었다. 덕분에 공주와 논산간 도로에서 갑사까지 약 1리 정도를 추가로 넓혀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도로가 생기자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매우 편리하였는데, 1926년 7월경에는 도로 곳곳에 훼손된 곳이 생겨 불편과 원성이 자자하였다. 더구나 갑사 인근 여관에 있을 때에는 식사하기가 매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의 비난이 많다는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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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7월 12일, 갑사 관광객의 비난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갑사에 모인 목사들]
동아일보 1926년 8월 31일 “교회진흥회종료(敎會振興會終了) 감리교목사(監理敎牧師) 이십여인(二十餘人)이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에서”
공주를 비롯한 천안 홍성 등지의 감리교회 목사 20여명이 계룡산 갑사에 모여 교회진흥방책을 토론하였다. 이들은 8일간 여러 가지 사항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도대체 기독교신자인 목사들이 왜 사찰에 모인 것일까. 이들 감리교회 목사들은 1년전인 1925년 9월에는 동학사에 모여 같은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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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8월 31일, 갑사에 모인 목사들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사라진 나무 부처]
동아일보 1929년 11월 28일 “목불(木佛)을 훔쳐가,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서”
1929년 11월 18일 오전 4시경 갑사 대웅전에 있는 목불이 사라졌다. 어떤자가 훔쳐간 것이 분명한데 승려들이 각방으로 노력해도 찾을 수가 없어, 결국 경찰에 고발하였고 수사에 들어갔다. 도난당한 부처상은 건조한지가 삼백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목불은 그 후로도 찾지 못하였고 지금 대웅전에 있는 불상은 새로 조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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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28일, 목불이 도난되었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갑사 주지를 선출하다.]
동아일보 1939년 11월 2일 “계룡산 갑사주지 진산식 성대거행(鷄龍山 甲寺住持 進山式盛大擧行)”
1939년 갑사 주지였던 박정선(朴正善)씨는 10월에 임기 만료가 되었고, 지난 7월 15일까지 갑사 주지 예선 선거를 시행하여 현직 갑사 회계를 맡고 있던 김정회(金正會)씨가 최고점으로 당선되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갑사는 충남의 사찰 중 “재원도 제일 풍부하고 승려도 많은 거찰”인데 주지가 되려면 불가에서도 그 학행이 모두가 인정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당선된 김정회씨는 평소에 평판이 좋았던데다 소년주지로는 갑사에서 처음 당선된 만큼 일반승가에서는 그의 장래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정회씨가 당선된 후 10월 31일 갑사 대웅전에서는 단풍이 우거진 가운데 진산식(進山式)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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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1월 2일, 갑사의 주지를 새로 선출함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