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C04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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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내수 |
[남편과의 만남에서 결혼까지]
원골 로 시집 와서 지금까지의 지내온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 임형화(49세)씨는 원골마을 동계 총무인 조병동의 부인으로 원골에 살고 있는 얼마 안되는 40대 젊은 주부 가운데 한사람이다.
임형화는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고, 20대 시절에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을 하던 중 충북 옥천으로 파견을 나가 근무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우연히 지금의 남편과 같은 고향 초등학교 동창인 이효순을 알게 되었다. 객지에서 서로 의지하며 친하게 지내던 중 좋은 사람이 있으니 사귀어보겠냐며 당시 공주군 유구면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남편 조병동을 소개해 주었다.
임형화는 싫은 것은 아니었기에 이효순의 소개에 동의하여 연락처를 받았고, 처음에는 얼굴도 모르는 채 편지를 두 번 정도 주고받았다. 그 후에 사진을 받고 보니, 사진으로 본 당시의 남편은 거의 첫 눈에 상당한 미남으로 호감이 갔다고 한다. 그 후에도 편지로만 사귀다가 두 달 정도 지난 뒤에 충남 온양의 현충사에서 처음으로 만나서 첫 데이트를 시작하였다.
사진으로 봤을 때와는 달리 직접 만나보니 피부가 흰 편이었고, 잡티하나 없는 잘생긴 신선해 보이는 인상, 특히 눈이 빛났고 입은 어려 보이는 듯이 웃고 있었다. 또한 반듯한 어깨, 적당히 큰 키, 필요할 만큼의 근육질의 강단이 있어 보이는 체격 등 임향화는 꿈꾸듯 홀딱 반해버렸고, 두 사람은 처음 만날 때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서로 자석에 끌리듯이 첫눈에 서로가 서로에게 반하였다고 지나간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함께 식사를 하는데 임형화가 젓가락질을 잘 못하니까 남편 조병동은 혼자 말하듯이 “집안에 어른들 계신데 젓가락질을 못하니 어쩌지...”하는 말을 하는 데서 조병동이 임형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두사람은 서로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마음으로 열렬히 사랑을 하였다고 한다.
연애시절 만나면 남편은 어디서나 손을 꼭 잡고 한시도 놓아주지 않았다. 항상 손을 잡고 부끄럼 없이 돌아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임형화는 잡티 하나 없는 외모와 깨끗한 남편의 성품에 이끌려 6년간이나 연애를 하였다. 지금의 남편은 면서기를 오래 전에 그만두고 농사일만 하여 얼굴이 햇빛에 그을려 옛 모습이 없다.
남편과 연애로 사귀는 동안 임형화는 자주 원골에 왔었다. 때는 정확하지 않지만, 처음 원골에 왔을 때 겁이 많이 났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집안 어른들이 많다는데 퇴짜를 맞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떨리는 마음이었다.
시할머니께서 나를 보실 때는 온 동네 할머니들이 다 와서 나를 방 가운데 앉혀 놓고 삥 둘러앉아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얼굴은 물론 귀와 손금, 앉은 모양, 말소리 등등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발만 빼놓고 몸을 요리조리 만져보기도 하였다. 여기서 손금은 매우 중요했다. 할머니들이 손금을 보는데, 당신네들 손자들의 명이 여자들의 손금에 달려있다고 고개를 꺄웃거리면서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어른들이라 어렵기도 하고, 가뜩이나 부끄럽고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떨리던 중 할머니 한분이 “괜찮다. 복스럽게 생겼고 시할머니 닮았다”고 칭찬을 하니 다른 할머니들도 동의하여 긴 시간의 선보기가 지나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런 일은 임형화 만이 겪은 것이 아니라 이 동네에 시집온 새댁들은 모두 다 겪은 일이라고 한다.
시할아버지께서는 임향화를 보고 매우 흡족해 하고, 유구에 있는 양화점으로 데리고 가셔서 반부츠까지 맞추어 주었다. 그때의 고마움과 기쁨은 뭐라고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난다고 하였다. 그 후 임형화는 원골에 자주 왔고, 그 때마다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 그리고 시아버지과 시어머니께 큰절로 인사를 올렸고, 어른들은 무척이나 귀여워 해주었고 갈 때는 손에 용돈까지 쥐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친정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종갓집 며느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시골에서 많은 시댁식구들 틈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 하며 안 된다고 한사코 반대를 하였다. 당시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라서 결국 남편은 오빠를 만나서 반승낙을 받았고,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하였다. 결혼식은 신식으로 유구읍에 있는 예식장에서 친척들을 모시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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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향화 부부 결혼식
[원골로 시집와서 시어른을 모시며...]
임형화가 결혼할 무렵 시댁의 할아버지께서는 당뇨로 인한 입원과 수술로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고 한다. 특히 정신이 치매환자처럼 제대로 분간을 하지 못하실 만큼 혼미하셨다. 아침 식사를 드시면 시할머니과 시부모께서는 들로 일하러 나가고, 주로 혼자 집에서 시할아버지을 모셨다. 할아버지께 식사 때가 되어 밥상을 올리면 “이거 얼마씩이냐?” 하시기도 하였고, 헛것을 보시고 “저기에 누가 있다”고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웃집을 가리키며 “저 것이 내 집이다. 집으로 가자”고 하여 부축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씀을 드리면, “이 집이 내 집인데 어디로 가느냐?”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신혼 초라서 너무나 무서웠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고 하였다.
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이번에는 시할머니가 몸져누우셨고, 할머니의 대소변을 시어머니께서 2년간이나 받아 내셨다. 놀라운 일은 우리는 대소변 받는 것을 보면 밥도 못 먹을 정도였는데, 시어머니께서는 장갑도 끼고 않고 맨손으로 뒤를 물로 닦아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손을 닦고 그 손으로 쌈을 싸서 식사를 하였다. 시어머니는 “돌아가신 뒤 제사상에 아무리 잘 차려놓으면 무엇 하느냐? 살아 계실 때 잘 해드려야지”라고 하셨다. 평소 시할머니께서는 내리 사랑이 지극하셔서 시어머니가 좋은 것 맛있는 것을 놓아드리면 안 드시고 계시다가 시어머니가 일보러 나가신 틈을 타서 그것을 증손주인 민기와 향기(우리 아이들)에게 주시곤 하였다.
시할머니께서는 약 2년 정도 자리에 누워 계셨는데, 그 동안 시어머니의 고생이 많았다. 또한 당신의 뜻이 맞아도 어른의 뜻을 우선하였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의 슬픔은 이만저만 아니었고, 임형화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기억하였다.
시집을 와서 시댁의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집안은 부유하였지만, 모든 어른들이 티끌 하나라도 버리지 않는 검소한 점이 생활 속에 배어있어서 아직 그러한 생활습관이 몸에 배지 않은 임형화로 하여금 힘들게 하였다. 하루는 빨래를 하는데, 물을 부어가면서 비누칠을 하니까 할머니께서 “그렇게 하면 비누가 많이 들어가니 물을 꼭 짜고 비누질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른들께서는 그릇에 밥알이 남으면 그것을 물로 헹궈서 드시고, 지금도 마당에 콩 한 알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반드시 주을 정도로 검소와 절약을 실천한다고 한다.
시집을 와서 생활을 해보니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처녀 때는 ‘남들은 농촌봉사활동도 하는데 시집가서는 무엇을 못하랴’라고 생각하였었다. 시집가면 어른들과 가깝게 지내도록 힘쓰고, 친정처럼 생각하고 생활하면 쉬울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보따리 싸가지고 나갈 정도로 농촌 일이 힘이 들고, 밥과 반찬을 장만하는 것도 대부분 당황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큰 아이를 갖게 되어 마음을 접고 큰 시누이를 뒤쫓아 다니며 된장은 어떻게 끓여야 되냐며 물어가면서 조금씩 배워가며 살림을 하였다. 반찬이 실패하면 어른들 몰래 아궁이에 몰래 처넣기도 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있는 집이라 그런지 몰래 반찬을 없애도 많이 있으니까 표가 나지 않아 괜찮았는데, ‘만약 내가 없는 집에 시집을 왔다면 금방 표가 나서 쫓겨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결혼 전에 “나는 잘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였을 때 남편은 “내가 도와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신혼 초에는 남편이 부엌에 들어와 도와주고 조언도 해주었다. 그러나 어른들께서 사내가 무엇 하러 부엌에서 얼씬거리느냐며 불호령을 내려 남편의 도움도 중단되었다고 한다.
시집와서 처음에는 시조부모 내외, 시부모 내외, 시동생과 시누이 4명, 그리고 임향화 부부까지 11명의 가족이었다. 농사일 등 일에 쫓기다 보니 모든 것 하나하나 하는데 힘이 들었고, 시집 식구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른들이야 그까짓 거 하셨겠지만 임형화에게는 속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벅차고 힘들었었다고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보니 ‘왜 많고 많은 사람들과 이 넓은 세상 가운데 하필이면 농촌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가’하는 생각이 들어 아무도 몰래 뒤 곁에 쪼그려 앉아 울다가 하필 시동생에게 들켰다. 그때 아마도 시동생은 마음이 아팠는지 작은 시누이들을 불러 모아 엎드려 뻗쳐놓고 야단을 친 적도 있다. 임형화는 그럴 때마다 뉘우치기도 하고 생각을 돌이키려고 노력하였다.
무엇이 그렇게 힘이 들고 어려웠는지 말을 하자면 한이 없지만, 당시를 얘기하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농촌으로 시집을 와서 밥만 먹으면 뜨거운 햇빛을 아랑곳 하지도 못하고 호미들도 나가 엎드려 밭을 매야하고, 해가 떨어져 저녁때가 되면 어김없이 그 시간에 저녁밥을 하러 들어와야만 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하면 다음날 아침에 늦잠을 잘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큰 가마솥에 가득 물을 데워야만 시조부모, 시부모, 직장 나가는 남편과 대학 다니는 시동생과 시누들,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시누들까지 세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얼른 밥을 지어야 하니까 큰 가마솥에는 물 가득, 중간 가마솥에는 밥, 작은 가마솥에는 국을 끓여야 하니까 세 개의 아궁이에다 불을 지피고 왔다 갔다 하면서 아궁이에 나뭇가지를 넣으면서 밥과 국을 지었다.
한참 밥 전쟁을 치르고 식사를 하고 나면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임형화를 기다렸다. 또 울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본인 한사람 때문에 식구들 불편해질까봐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도 결혼 전에 그렇게 말리던 친정어머니 생각을 하면 또 목이 메이곤 했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연애시절에 그렇게 그립고 보고 싶고 좋아 보였던 남편의 매력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큰 아이 민기를 낳을 무렵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 하루는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의 빨래를 삶다가 보건소 직원(당시에는 보건소 직원이 마을로 돌아다녔음)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빨래를 태워버린 것이었다. 당시 임형화는 얼마나 놀랐는지 몸이 후들거릴 정도로 떨렸었다고 한가. 임형화는 빨래 태운 것을 들킬까봐 얼른 뒷간에 버리려고 갔다가 순간 ‘재를 치울 때 들킬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화장실로 가지고 갔다. 화장실에 버리려고 하다가 ‘안돼, 인분을 치울 때 들키면 큰일이야’라고 고민하던 중 뒷동산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뒷동산에 버리면 아무도 모르겠지 생각되어 뒷동산에 올라가 태운 빨래를 몰래 버렸다. 몇일 후 동네에 사는 친척 할머니께서 오셔서 “다음부터 어른들 빨래를 태우면 그렇게 애태우지 말고 나한테 가져와, 내게 가져오면 내가 태워줄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임형화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아셨냐고 물으니까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뒷동산에 매어둔 염소를 데리러 갔다가 우연히 몰래 버린 타나 남은 빨래를 발견하고 며느리가 어려워할까봐 일부러 모르는 척 하였던 것이다. 당시 임형화는 몸둘바를 몰랐었고, 지금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빨래가 타서 놀랐던 가슴은 지금도 두근거린다고 했다.
결혼 초 어려운 시기를 어느 정도 적응할 즈음 시동생은 결혼을 하고 서울에 살게 되었는데, 형수 고생한다고 매달 여성잡지를 사서 보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막내 시누 등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여 장학금을 받으면 새언니 고생한다고 받은 장학금을 반씩 떼어주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신랑보다도 시댁 식구들, 시동생과 시누들이 많이 도와주어서 임형화의 결혼 초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온 것 같다고 말한다.
[원골 사람들과 함께해온 농촌생활]
임형화가 시집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시댁에 적응을 못하고 있을 때, 하루는 냇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많은 식구들의 빨래를 하였다. 그때는 갓 시집온 새댁이라서 아직은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잘 모르고 서먹서먹하였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빨래가 너무 많다고 같이 나누어서 빨아주었다. 당시에는 말도 못하게 고마웠고, 시골의 후한 인심을 느꼈다고 한다.
원골의 젊은 며느리들은 모두다 시부모님을 모시며 살고 있었다. 임향화 본인만 어려운줄 알았는데 모두 마찬가지이거나 더 힘겨운 농촌생활을 견뎌내며 열심히 살고 있는 같은 입장에서 동네 젊은 며느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대화를 나누고 속마음을 나누니까 어려움이 덜해지는 것 같았다.
농촌으로 시집와서 처음 해보는 농사일은 처음에는 너무 새롭고 신기하였다. 일은 힘들었지만 재미도 났다. 밭을 매다 보면 내손으로 깔끔해진 밭을 보면 대견스럽고, ‘아! 이 맛에 농사를 짓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면 재미있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그러나 콩을 털어 담아놓을 때의 뿌듯한 마음, 곡식을 거둘 때의 풍성한 마음도 해마다 반복이 되니까 점점 어려워지고 재미보다는 점차 힘든 노동으로 생각되어갔다.
그간은 멋모르고 해왔으나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 같으면 일꾼을 얻어 할 일도 일꾼을 못 얻게 하고, 뜸모 같은 것도 하러 다니는 일을 자청하고 있다. 그것은 되도록 절약을 하여 아이들을 위하여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본인이 그만큼 성장하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웃과 더불어 어우러져 한가족처럼 울고 웃으며 사는 곳이 농촌마을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동네 어른들 모두가 존경스럽고 타지에서 만나면 부모형제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시집와서 지금까지 어려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요즈음은 시골이 좋다는 생각을 확실히 한다고 한다. 시골은 부지런하고 열심히 노력만 하면 도시처럼 일자리가 없어 고생하지는 않기 대문이다. 또한 이웃 간에 정이 두터워서 형제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평화로운 풍경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마음이 편안하다.
시집오기 전에는 시골에 와서 영농에 대한 교육도 받고 조용히 생각도 많이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려 하였는데, 막상 시집을 와서 보니 시댁은 생각도 못할 만큼 일이 많은 집이라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손에 의하여 자라나는 농작물의 모습을 보지 않고, 도시에서 이웃 간에 정도 없는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농사일도 많이 해보니까 숙달이 되어 요령도 생겼고, 또 전에는 동네를 걸어 다녔는데 지금은 오토바이를 교통수단으로 타고 다니고 있다. 아침과 저녁시간에 농사일을 하고, 더운 시간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시원한 계곡이나 인근 마곡사 같은 곳을 자주 다니고 있어 도시 사람들이 만끽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즐기며 지내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여유 있고 각박하지 않은 이렇게 편안한 곳으로 요즘 처녀들은 시집을 오지 않으려고 하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좋은 새댁들이 우리 마을에 시집와서 마을이 더욱 생기가 넘치고, 풍요로워지고 아이들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