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A0301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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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난영 |
계룡산 북쪽 줄기의 고청봉이 바라보이는 아늑한 공암마을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그 중 대부분은 풍수와 밀접하게 관련지어 내려오는 것들인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마을의 터나 지리 등의 특색을 반영해 준다. 이 중 조사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솔고개와 서낭당]
마을의 서북쪽 양지마을 도로가에는 아직도 300년 묵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솔고개인데, 고개의 위아래를 구분하여 윗솔고개, 아랫솔고개로도 부른다. 아래솔고개에는 서낭당 돌무더기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도 하였던 장소이다. 교통의 요지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현재는 공주와 대전으로 가는 갈래길로 삼거리를 이루고 있다. (제보자 : 서만호)
[산신제 지내는 배나무골]
300여년 전 공암마을 사람들은 산신에게 소원을 빌곤 했다. 배나무골은 고청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이곳에 배나무(아그배)를 지주로 계룡산 산신을 모시고 해마다 정월 초삼일에 제사를 올렸다. 산신제의 전통은 사라졌지만, 경치좋고 조용한 배나무골은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장소가 되었다.(제보자 : 서인호)
[마티고개]
반포면 마암리에서 공암리로 넘어오는 고개를 마티고개 또는 말재고개로 부른다. 이 부근 마을에 김생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계시하시기를 내일 뒷산에 올라가면 큰 바위 속에서 말 한 마리가 나올 것이니 그 말을 이용하여 품팔이를 하라는 것이다.
김생은 다음날 산에 가니 과연 말이 바위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김생은 그 말을 끌어다 품팔이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고, 그것으로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를 하였다. 이런 까닭에 이 고개를 마티고개로 부르게 되었다.(제보자 : 서인호)
[청룡이 나온 용목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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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목골
고청봉의 동쪽 산골짜기 바위에 물이 가득찬 웅덩이가 있다. 여기에는 용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이 바로 이 바위 속에서 나와 물에서 목욕을 하고 승천하였다 한다. 공암리 사람들은 가뭄이 들어 농사짓기가 힘들 때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이곳으로 와 기우제를 지냈다.(제보자 : 서만호)
[매화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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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초등학교
반포초등학교 가 자리한 터를 매화락지라 부른다. 풍수지리상 매화잎이 떨이지는 자리라는 뜻이다. 매화락지는 명당터로 이곳에서 인물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반포초등학교 출신 중에 국회의원, 장관, 장성, 박사 등을 비롯 수많은 명사가 배출되었다. 마을사람들은 고청봉에 올라 반포초교를 바라보년 꽃잎처럼 울긋불긋한 옷을 잎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 자체가 영락없이 떨어지는 꽃잎같다 하여 매화락지라는 풍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이 학교 출신 중에 더 많은 인재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제보자 : 서인호)
[둠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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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배산
둠배산 은 고청봉의 산줄기에 연결된 나지막한 야산이다. 소가 누운 듯한 모습이라 하여 와우산이라고도 하는데 소가 누워 배가 불룩 나왔다는 뜻에서 둠배산이라 하였다. 원래 와우형 지세는 명당으로 유명한데, 이곳에 묘를 썼던 김종학은 천석군이 되었으며, 소 머리 부분에 묘를 썼던 사람의 자손도 외지로 나가 크게 출세하였다 한다. 지금은 양지말과 둠배산 일대에 전원주택 단지가 조성되어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제보자 : 서인호)
[폭파된 공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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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공암교
1950년 6월 25일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었고, 공암마을에도 한국전쟁의 피해는 비켜갈 수 없었다. 특히나 공암은 공주와 대전을 연결하는 32번 도로가 관통하는 마을로서 당시 인민군과 미군이 번갈아가면서 지나갔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미군들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에게 모두 마을을 떠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을을 빠져나가자 서둘러 공암다리를 끊어버렸다. 이것은 미군이 후퇴하면서 뒤쫓아 내려오는 인민군들의 발을 묶기 위한 수단이었다. 미군에게 피난지시를 받은 마을사람들은 일주일 가까이 인근의 신도안이나 상신리, 하신리, 학봉리 혹은 가까운 산속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한편 발이 묶인 인민군들은 얼마간을 공암 일대에 머물렀다. 특히 인민군이 많이 머물렀던 곳은 현재 파출소 자리 뒤편이었는데, 이곳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밖으로 잘 노출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 인민군이 주둔한 것을 안 미군은 B-19라는 기종의 전투기를 이용하여 마을에 폭탄을 투하하였다. 이때 투척된 포탄은 그 위력이 센 편이어서 폭탄이 떨어진 곳에는 직경 약 20M에다 6~7M 정도의 깊이로 땅이 패거나 뒤집어졌다고 한다. 이 폭탄으로 인하여 당시 인민군들이 이 일대에서 많이 목숨을 잃었으며, 부상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폭탄이 빗나가 길만동 일대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온 후 ‘치안대’라는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에 의해 우익 성향의 몇몇 주민들이 대전 목동 교도소로 보내져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또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전투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주민도 3명이나 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 남아있는 공암교만이 당시의 한국전쟁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부이다. 한국전쟁 당시 폭파된 공암교는 그 후 복원되어 지금도 남아있지만, 1979년에 바로 옆에 새로 놓아진 신공암교와는 다르게 사람이나 차량의 이동 없이 쓸쓸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고청봉 정기받은 마을, 공암리』, 20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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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공암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