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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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憲昌-亂 |
영어의미역 | Gim Heonchang's Rebell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김갑동 |
[정의]
822년(헌덕왕 14) 웅천주에서 김헌창이 일으킨 난.
[역사적 배경]
김헌창(金憲昌)[?~822]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주원(金周元)이다. 김주원은 선덕왕(宣德王) 6년에 김경신(金敬信)[원성왕]과의 왕위 계승 경쟁에서 패한 후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780년(혜공왕 16)에 일어났던 정변에서 큰 공을 세운 덕에 아들 김헌창은 정부에 참여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김헌창은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을 거쳐 807년(애장왕 8)에는 시중(侍中)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 중 실력자였던 김언승(金彦昇)[헌덕왕]에 버금가는 실력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외직인 무진주도독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데다가 자신마저 외직으로 쫓겨나자 김헌창은 반란을 결심하게 되었다.
[경과]
김헌창은 청주도독(菁州都督)을 거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이 되었을 때 마침내 백제 유민의 반신라(反新羅) 감정을 이용하여 옛 백제의 수도였던 웅천주(熊川州)[공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822년(헌덕왕 14) 마침내 김헌창은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그리고 무진주(武珍州)[현 전라남도 광주]·완산주(完山州)[현 전주]·청주(菁州)[현 진주]·사벌주(沙伐州)[현 상주]의 4주 도독과 국원경(國原京)[현 충주]·서원경(西原京)[현 청주]·금관경(金官京)[현 김해]의 3소경 사신(仕臣: 소경의 장관)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청주도독 향영(向榮)이 몸을 빼어 달아났고 한산주(漢山州)[현 경기도 광주] 와 삽량주(歃良州)[현 양산], 패강진(浿江鎭)[현 황해도 평산]과 북원경(北原京)[현 원주] 등의 여러 성은 먼저 김헌창의 역모를 알고 병사를 모아 방어하였다. 완산주의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경주로 도망쳐 와 변란을 고하자, 헌덕왕은 장수 8명을 선발해 경주의 8방을 지키게 한 후 군대를 출동시켰다.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이 선발대로 가고 잡찬(迊飡) 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 제릉(悌凌)이 뒤따라갔으며, 이찬(伊飡)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도 주력 부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다. 장웅의 군대는 도동현(道冬縣)에서 김헌창군을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과 합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현 보은]을 쳐 이기고, 다시 군사를 속리산으로 보내어 김헌창군을 섬멸하였다. 균정 등은 성산(星山)[현 성주]에서 김헌창군과 싸워 이를 멸하였다. 제군(諸軍)이 함께 웅진에 이르러 김헌창군을 참획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결과]
반란군이 패하려하자 김헌창은 겨우 몸을 빼어 성내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그러나 관군의 포위와 공격이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니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게 되었다. 이에 김헌창은 화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마침내 김헌창의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3년 뒤인 825년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壽神)과 함께 고구려 유민의 반신라 감정을 이용, 남평양(南平壤)에 도읍한다는 명분아래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무열왕계는 신라의 왕위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