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생원. 강숙지는 조선 중기 중종 때의 생원으로서, 용인현에서 살았는데, 도둑 누명을 쓰고 발가락이 뽑히는 형장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더불어 그 아내도 결박당하여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에 명확히 죄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신(武臣)인 포도장(捕盜將) 이종례(李宗禮)가 함부로 형장을 써서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였다며 조정에서 이종례를 추고하도록...
-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도사(道士). 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격암(格庵)이다. 남사고는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秘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1592년(선조 25)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
-
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실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경(儆), 자는 계중(戒中), 호는 서파(西坡)·방편자(方便子)·남악(南嶽). 영의정 유순정(柳順汀)의 11세손이며, 아버지는 목천현감(木川縣監) 유한규(柳漢奎), 어머니는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쓴 사주당(師朱堂) 이씨이다. 영조 대에서 헌종 대까지 살았던 학자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여 『언문...
-
조선 후기 용인의 문인. 본관은 전주(全州). 조선조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敬寧君)의 11대 손으로, 남편은 목천현감인 유한규(柳漢奎)이고, 아들 유희(柳僖)는 『언문지(諺文志)』를 저술한 한글학자이다. 충청도 청주(淸州) 서면(西面) 지동(池洞)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녀자의 솜씨를 익히고 옛 열녀를 마음으로 사모하여 이에 『소학(小學)』, 『가례(家禮)』, 『여사서...
-
경기도 용인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 유학자. 조선 후기 유학자로 『문산집』을 남기었고 특히 노론의 유학자로 남인인 다산 정약용과 시문으로 토론을 벌인 용인의 유학자. 이재의(李載毅)[1773~1839]의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여홍(汝弘), 호는 문산(文山)이다. 덕천군의 14대 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조 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주국(李柱國)이며, 아버지는...
-
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학자. 이행상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영조·정조 대에 활동한 학자이다. 후대에 학문 성과를 인정받아 송단(宋湍)·성덕명(成德明) 등과 함께 이재 문하의 삼처사(三處士)로 불리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골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부터 사서삼경에 통달하였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리(公履), 호는 왕림(旺林). 문강공(文...
-
일제강점기 용인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삼(聖三), 호는 관란(觀瀾). 초명은 정동로(鄭東魯)이다. 정관해는 경기도 용인군 지역을 중심으로 후학 양성과 전통 고수에 힘쓴 유학자로서, 일제강점 직후인 1912년부터 해방 공간인 1947년까지의 한문 일기를 남기고 있다. 일기를 통해 신식 교육의 도입으로 인성 교육을 강조하였던 전통 교육이 무너짐을...
-
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유생. 조중우(趙重遇)[?~1721]는 1721년(경종 즉위년)에 왕의 생모로 폐서인이 된 희빈장씨의 작위를 회복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조중우는 “장씨는 바로 우리 성상을 낳아서 기르신 사친이신데 성상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 서인의 지위에 있으므로 내가 상소를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승지 홍치중, 권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