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909
한자 金鍾學
영어공식명칭 Kim Jongha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연표보기 - 김종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김종학 천도교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김종학 천도교 부여 원홍산 전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7년 4월 - 김종학 천도교 부여 교구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김종학 3·1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김종학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 김종학 천도교의 특별성미금 모금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 죄목으로 체포 및 기소
몰년 시기/일시 1945년 8월 14일연표보기 - 김종학 사망
출생지 가덕리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가덕리 지도보기
활동지 기도미 납부 운동 - 부여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천도교 교구장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종학(金鍾學)[1889~1945]은 1889년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가덕리에서 태어났다. 1912년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1917년 천도교 부여 원홍산 전교사로 임명되었고, 1917년 4월 천도교 부여교구장이 되었다. 3·1 운동 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3월 31일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3·1 운동 이후 천도교도들은 기도미와 성미 납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도미는 교인들이 집에서 기도할 때마다 5홉 정도를 청수와 같이 올렸던 쌀을 모아 지역 교구에 납부하는 것이었으며, 성미는 천도교도 가정에서 끼니때마다 가족 수만큼 숟가락으로 덜어 모은 쌀을 소속 지역 교구에 납부하는 것이었다. 지역 교구에서는 매월 말 쌀을 현금화하여 절반을 중앙 총부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교구 운영비로 사용하였다.

김종학은 부여교구 교구장으로서 기도미 납부 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1919년 5월 이후 천도교의 특별성미금을 조사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집의 죄목으로 천도교 중앙과 지역 교구 임원 159명을 체포하였다. 김종학을 비롯한 천도교 임원 45명은 내란, 「보안법」 위반, 범인 은닉, 뇌물 증여, 횡령 등으로 기소되었다. 김종학은 1945년 8월 14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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