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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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 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헌주 |
[정의]
1919년 3월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 만세 운동.
[개설]
부여 지역에서 3·1 운동은 초기 단계에서는 「독립선언서」나 유인물을 배포하고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점차 확산하면서 폭력 시위 양상이 나타났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부여의 3·1 운동은 천도교구를 통하여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를 수령하여 3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2일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는 식민지의 최고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식민지 지배 구조로 재편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하였다. 학교에서는 민족 교육이 억압받고, 종교계에서는 민족적 신앙이 탄압당하였다.
일제는 경제적으로도 우리 민족을 수탈하였는데, 1910년에는 ‘회사령(會社令)’을 실시하여 민족 자본가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1910~1918년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불법으로 토지를 침탈하여 온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이때 일제는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하에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만 인정하였으며 경작권 등 농민의 여러 권리는 완전히 부정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이 몰락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빈민·노동자가 되었다. 당시 노동자가 된 조선인들은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 차별 등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하여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였다. 그 결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 민족적으로 고조되었다. 이러한 전 민족적인 민족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에서의 비밀 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및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하여 운동 역량이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0년대 말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하였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 방안에 민족 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하였다. 민족 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 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해방운동을 고양시켰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1919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경과]
부여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1919년 3월 2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2일 부여 외에도 청주, 순천, 평강, 김화 등지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독립선언서」 전달은 천도교의 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천도교에서는 「독립선언서」 2만 매를 교단 산하의 보성사에서 인쇄하여 전국의 교단 조직을 통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부여 지역에 전달된 「독립선언서」는 익산대교구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부여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본격화된 것은 1919년 3월 6일이었다. 독립 만세 시위가 시작된 장소는 임천 구교리였다. 임천과 은산 지역의 천도교인들은 박용화(朴容和), 최용철(崔容澈)을 중심으로 은산면사무소와 임천공립보통학교[현 임천초등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임천 구교리에서의 시위에는 1906년 홍주의진에 참여하였던 홍순대(洪淳大)도 참여하였다. 3월 6일의 기세를 몰아 이튿날인 1919년 3월 7일에는 부여 백마강 나루터에서 읍내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1919년 3월 7일 홍산에서 산상 횃불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헌병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3·1 운동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홍산면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옥산면 내대리 출신의 조병선(趙秉旋)이 있다. 충화면 가화리 출신의 양재흥(梁在興)은 1919년 3월 29일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날 시위 때 태극기를 배포하였고, 유성열 또한 200여 매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부여 세도면 출신의 추병갑(秋炳甲), 엄창섭(嚴昌燮), 고상준(高相俊), 김종갑(金鍾甲), 서삼종(徐三鍾) 등이 3·1 운동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