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66
한자 六·二五 戰爭
영어공식명칭 The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전쟁,6·25 사변,6·25 동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48년 8월 15일 -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발단 시기/일시 1948년 9월 9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6·25 전쟁 발발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14일 -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에게 이양
전개 시기/일시 1950년 8월 18일 - 부산 천도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15일 -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28일 - 서울 수복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0월 2일 - 중국 참전 결정
전개 시기/일시 1951년 1월 4일 - 1·4 후퇴
전개 시기/일시 1951년 7월 10일 - 개성에서 제1차 휴전 협상 본회담 개최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연표보기 - 6·25 전쟁 종결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부여군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지속된 남한과 북한의 전쟁.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과 9월 한반도에는 남과 북에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해방과 함께 이루어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이 남북 갈등과 좌우 대립을 거쳐 분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남과 북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동아시아에서 가속화되는 냉전과 맞물려 한반도를 중심으로 정치·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1946년에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좌·우익 간의 다툼이 폭력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좌익 세력의 무장 투쟁을 강력히 진압하는 한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등 반공 체제 강화에 나섰다.

미군정기 부여군의 정치 상황도 여타의 군들과 흡사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부여에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한 연구에 따르면 부여군의 인민위원회는 해방 직후 부여군의 행정권을 장악한 뒤 실질적인 자치[통치]를 실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여 지역의 인민위원회와 청년 동맹, 농민 조합은 대부분 부여군 규암면에 본부를 두고 있었는데, 조직을 지도한 인물은 이호철, 강성구, 오기영, 전영철 등 대부분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과 관련하여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이들이었다고 한다.

1946년 초반 당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이었던 신익희(申翼熙)의 지시로 작성된 『충남 지방 실정 조사 보고』에 따르면 부여군인민위원회는 좌익들만의 조직이 아니었으며, 전영철과 오기영은 이념 대립을 청산하기 위한 ‘좌우 합작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여군의 좌익 단체들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1946년 초반경부터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충남 지방 실정 조사 보고』에 따르면 부여 지역의 좌익 단체들은 군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비밀리에 비공개적인 활동만 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당시 청년 동맹의 경우도 미군정의 해산 명령으로 비밀리에 비공개적인 활동만이 가능한 상태였으며, 농민 조합도 미군정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계통의 우익 단체들은 미군정의 지지 하에 활발한 조직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부여군의 우익 단체들은 “일치단결하야 완전 자주독립의 파쟁적 대립을 초월하여 융합을 도모하며 각자 자기의 직분을 다하여 국가의 동량으로서의 능력”까지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계통의 청년회는 활발히 활동하지 못하였고, 활동가도 소수였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한 평화 공세를 펼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군비를 증강시켰다. 남북한 사이의 무력 충돌 또한 계속되어 1949년에는 38선 주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봄이 되었을 때 남북의 대결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동의와 지원을 얻어 낸 뒤 구체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고, 남한은 반공 정책을 강화하면서 북진 통일을 주장하였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 지역에서 남한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서울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였고 한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은 1950년 7월 14일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이양되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린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킨 것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단행한 ‘인천 상륙 작전’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고, 유엔군과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후퇴하였고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에서 철수하였다. 이를 ‘1·4후퇴’라고 한다.

이후 전선은 38선에서 교착되었다. 결국 1951년 7월부터 소련의 제안으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년에 걸친 장기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부여군도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4일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민간인 수십여 명이 예비 검속되어 백마강 구드래나루터에서 집단 학살당한 ‘부여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대표적이다. 부여 국민보도연맹사건은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하여 진실 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한편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연쇄적인 보복 처형으로 이어졌는데, 보도연맹원으로 처형된 이들의 가족들이 인공 치하에서 보복 행위에 나섰고 인민군이 부여에서 철수한 뒤에는 남아 있는 좌익과 좌익 가족들이 경찰 및 우익 세력들에 의하여 부역 행위를 하였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 처형당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우익의 갈등은 동족 마을 사이에서, 또는 동족 마을 내부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신분 및 계급 갈등이 폭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은산면에서 조직된 호국 대원들이 강원도 양구군에서 치러진 도솔산 전투에 투입되어 북한군과 교전을 치렀는데, 이때 은산리 출신의 이존섭, 오관석, 문덕흥 등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1987년 전투 지역이었던 도솔산에서 합동 위령제가 치러졌고 추모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결과]

3년에 걸쳐 벌어진 6·25 전쟁은 부여군은 물론 남북한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하였고, 이 가운데 남한의 인명 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하여 약 200만 명이다. 또한 수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물적 피해 또한 막대하여 전쟁 기간 중 남한에서만 전체 산업 시설의 43%, 주택의 33%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 협정 체결 후 휴전 협정 제60조에 따라 1954년 4월 26일부터 1954년 6월 15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의 평화적인 통일 방안과 외국군 철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제네바회담이 개최되었다. 제네바회담에서는 한반도 통일 방안이 주로 논의되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현재 한반도는 휴전선을 중심으로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은 전개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 소련, 유엔 등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기 때문에 내전과 국제전적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6·25 전쟁으로 남북한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남북한 간의 적대적 감정이 더욱 강화되어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한편 부여군은 전쟁 시기 벌어진 좌우 갈등과 민간인 학살로 인하여 공동체가 분열되고 극심한 대립을 겪었다.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화해를 위한 노력이 요청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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