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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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 農民 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헌주 |
[정의]
1894년 부여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심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
[역사적 배경]
동학 농민 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여서 국가 재정도 전라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민란이 일어났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간신히 난을 피하여 전주에 이르러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보고하고, 김문현은 다시 정부에 알리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조병갑의 죄상을 알게 되자 조병갑을 체포하여 파면하고, 새로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였다. 한편,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용태는 사후 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동학교도의 격분을 샀다.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 동학 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한 거사를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이름으로 된 ‘무장동학포고문’에서 과감히 봉기할 것을 요청하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 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전봉준은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에 앞장섰다.
[경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은 처음에는 종교적 입장을 고수하여 무력 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렸다. 남접의 전봉준 등을 가리켜 ‘국가의 역적이며 사문(師門)의 난적’이라고까지 극언하며 대립하였다. 그러나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오지영(吳知泳)이 조정책에 나서 항일 구국 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남·북접을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손병희(孫秉熙) 지휘하의 1만 명에 이르는 북접의 동학 농민군이 청산(靑山)에 집결하고, 곧 남·북접이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로의 북상 계획을 세웠다.
1894년 11월 하순 남·북접의 동학 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여 있을 무렵 여러 지방에서도 산발적으로나마 항일전이 벌어졌다. 목천·세성산(細城山)은 김복용(金福用)·이희인(李熙人) 등이, 수원은 김정현(金鼎鉉)·안승관(安承寬) 등이, 홍천은 고석주(高錫柱), 공주는 최한규(崔漢圭), 옥천은 정원준(鄭元俊) 등의 동학 접주들이 점거하였다.
충청도 지역의 동학 농민 운동 참여자는 총 1,103명이다. 군현별로 보면, 지금의 충청북도 지역에서는 보은 64명, 옥천 30명, 청주 42명 등 많은 수의 동학 농민 운동 참여자가 확인된다. 보은은 동학 농민 운동 발발 한 해 전인 1893년 보은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보은집회는 동학 대교조 최시형의 명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동학교도 수만 명이 모여 동학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요청하는 등 동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대규모 집회였다. 보은은 최시형이 오랫동안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던 지역으로 동학 농민 운동 참여자가 많이 분포하였다. 옥천 역시 최시형의 활동 지역으로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참여자가 나오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주는 최시형에 이어 대교조가 된 손병희의 근거지로 많은 인사가 손병희의 영향을 받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청주는 손병희와 같은 집안이며 동학교단의 지도자로 활동한 손천민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하다
[결과]
부여 지역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부여 지역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서는 부여군 대방면[현 부여읍]의 이복영(李復榮)이 쓴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복영은 20세인 1889년부터 1934년까지 일기를 남겼다.
이복영의 일기에 따르면, 대방면 지역에 농민군이 포접(包接) 조직을 설립한 것은 1894년 6월 말에서 7월 초순이다. 구체적으로 6월 27일 무렵 동학 농민군은 부여와 임천, 홍산 등지에서 포접 조직을 설립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포접 조직은 각종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도회(都會)를 열어 포 운영의 기본 방침을 결정하는 등 동학 농민군의 규칙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1894년 11월 동학 농민군이 공주 전투에서 대패하고, 동학 농민 운동이 쇠퇴하면서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