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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065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음역 Ilje Gangjeomgi
영어의미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진갑

[정의]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기도 용인의 역사.

[개설]

경기도 용인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등과 같은 반일 민족 운동이나 소년 운동, 청년 운동 등과 같은 반봉건적 근대화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행정구역]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으로 전국의 부·군·면을 통폐합하여 12부 220군 2,518면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경기도 용인군양지군 전역과 죽산군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수여면·포곡면·모현면·읍삼면·수지면·기흥면·남사면·이동면·고삼면·내사면·원삼면·외사면 등 12면으로 구성되었고 읍내면에 소재했던 용인군청도 수여면 김량장리로 옮겨졌다. 1937년 읍삼면구성면(駒城面)으로, 수여면이 용인면(龍仁面)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행정 구역 개편 시의 면·리의 명칭은 해방 이후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1870년대 경기도 용인군의 인구는 22,659명(남 11,239, 여 11,420)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양지군 전체와 죽산군의 일부가 편입되면서 상당수 증가하였다. 1915년 현재 용인군 인구는 조선인 13,734호 71,350명(남 36,684, 여 34,666), 일본인 123호 346명(남 210, 여 136), 중국인 6호 11명(남 11) 등 총 13,863호 71,707명(남 36,905, 여 34,802)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치안]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의병 운동으로 인한 통치상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헌병경찰에게 제한된 사법권을 부여하고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방대한 권한과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조선인의 민족 해방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려 했다. 1914년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에 용인헌병분대를 설치하고 헌병파견소 1개소, 헌병출장소 7개소를 관할하게 하여 헌병경찰에 의한 지배를 보다 확고히 했다.

1919년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1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 정책을 실시하였다.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에 설치되었던 용인헌병분대 대신 용인경찰서를 새로 설치하여 경찰에 의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1936년 현재 일제는 용인경찰서 관내에 주재소 8개, 출장소 1개소를 두어 용인 지역을 통치했다.

[교육]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교육을 보통교육, 실업교육, 전문교육으로 한정하여 고등교육을 억제하는 식민지 교육 정책을 실시했다. 경기도 용인군은 전형적인 농업 중심의 사회인데다 거리상 서울에의 유학이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실업기술학교뿐만 아니라 고등교육 기관도 설립되지 않았다.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6년 과정의 소학교를 4년제 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심상과·고등과로 구분하여 7년 과정으로 운용되던 중학교는 4년제 고등보통학교로 변경했다. 또한 민족교육의 온상이었던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으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도 1913년에는 2개의 사립학교가 확인되었지만 1920년대 이후 사립학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폐교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1922년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서당에 대해서도 탄압하기 시작하여 이후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다. 일제는 일본인들의 교육을 위해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용인학교조합을 설치한 뒤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에 용인공립심상소학교를 건립하였다. 경기도 용인 지역의 조선인 대상 교육 기관으로 1911년 7월 내사면에 양지공립보통학교, 읍삼면에 용인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여자보통학교는 4~5년으로 하여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의 수업 연한이 연장되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공립소학교는 용인공립심상고등학교와 기흥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다. 조선인을 위한 공립보통학교는 기흥공립보통학교·양지공립보통학교·김량장공립보통학교·송전공립보통학교·백암공립보통학교·원삼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으로 황국신민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간이학교·청년훈련소 등을 세우고 1941년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변경하였다. 1942년 경기도 용인 지역의 조선인 대상 공립국민학교로는 양지·신갈·김량·백암·송전·원삼·모현·고삼·수지·포고·남서·구성 공립국민학교가 있었다. 일본인 대상 공립국민학교는 용인공립국민학교와 기흥공립국민학교가 있었다.

2년제 초등 교육기관인 간이학교는 송전국민학교 부설 적동간이학교, 수지공립국민학교 부설 고기간이학교, 모현공립국민학교 부설 능원간이학교, 김량공립국민학교 부설 운학간이학교 등 5개가 운영되었다. 조선인의 전쟁 동원을 위해 1940년 용인공립청년훈련소·이동공립청년훈련소·백암공립청년훈련소가 개소되었고 1941년 신갈공립청년훈련소·내사공립청년훈련소·원삼공립청년훈련소가 개소되었다.

[경제]

1910년대와 1930년대 사이 용인군의 직업별 인구 구성에서 보이는 가장 큰 변화는 농·축산업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1910년대 93%에서 1930년대 83%로 줄어들었고 반면 광공업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1910년대 1%에서 1930년대 6%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 양상은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가 지속되는 가운데 점차 광공업을 비롯한 농업 이외의 다양한 직업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용인군의 농업은 쌀농사를 중심으로 보리를 비롯한 각종 잡곡과 고구마 감자와 같은 다양한 농산물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농업 생산에서 보이는 특징은 한국인이 주식으로 먹었던 보리를 비롯한 각종 잡곡의 생산량보다는 일본으로의 공급을 목적으로 경작된 쌀 생산량의 증가 지수가 높았다는 점이다.

[민족해방운동]

1. 3·1운동

3·1운동은 10년간의 식민지 무단 통치에 의한 조선인 전체 계층의 몰락, 정치·계급의식의 고양, 국내외 민족 해방 운동의 끊임없는 전개 과정 속에 내적 추진력이 있었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상층 부르주아계급을 대변하는 민족대표 33인 혹은 48인이 독립을 선언하여 이 운동에 불을 지른 단계이다. 제2단계는 주로 청년·학생·교사·지식인·도시노동자·상인층 등에 의해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되는 단계이다. 제3단계는 이 운동이 주요 도시에서 전국 각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는 단계이다.

경기도 용인군의 경우 민족대표와의 직접적 연계는 보이지 않고 다만 용인에서 태어난 김완규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참여했다. 경기도 용인 지역의 3·1운동은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 기간은 주로 농민들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대중 투쟁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3·1운동의 민중 운동적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용인군지』에 의하면 1919년 3월 21일 원삼면 시위에서 4월 2일 남곡리 시위까지 18회 7,800명이 참가하여 41명이 검거되고 5명이 피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2. 농민운동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 이후 식민 정책의 가속화로 조선 농민들 중 상당수는 여러 명목으로 동양척식회사, 일본인 지주, 친일파 조선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빼앗겨 소작농·농촌 빈민으로 전락하였다.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 등으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용인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3년 3월 동양척식회사 경기지점 용인지사가 설립된 이래 이들은 곧바로 농민들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용인에는 동양척식회사의 땅이 곳곳에 산재하여 농민의 소작인화를 더욱 부채질했으며 소작권을 얻은 농민들은 이전보다 더 심한 고율 지대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구나 소작권조차 얻지 못한 일부 농민들은 결국 토막민·화전민·농촌궁민이 되었고 경기도 용인군에서는 이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20년대 용인의 농민들은 동양척식회사나 가토오농장 등 일제의 지주회사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관리체계나 각종 부역에 시달렸으며 수리조합의 설립과 운영 등으로 인해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1920년대까지는 농민들이 대규모의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용인에서도 양적·질적으로 활발한 소작 쟁의가 전개되었다. 1930년대 용인 지역의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는 1932년 10월 31일부터 11월에 걸쳐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인들이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일으킨 쟁의, 1933년 12월 역시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인들이 일으킨 쟁의와 소작료불납동맹을 조직하여 전개한 투쟁 등이 있다.

당시 농민들의 소작 쟁의는 기본적으로 일제의 농업 침탈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님과 동시에 식민지 하 봉건적인 지주 소작 관계가 여전히 온존되고 있던 상황에서 그에 대항하는 민족적·계급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사회운동이기도 했던 것이다.

3. 노동운동

경기도 용인 지역의 산업은 전통적으로 농업이 중심이었으며 공업 등 여타 산업은 매우 취약하였다. 따라서 용인의 노동자수는 대략 7,000명 정도였는데 그 중 5,000명은 반농반노 혹은 실업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의 대부분은 수리조합 건설이나 경동철도 공사장 혹은 각종 도로공사 등의 인부가 대부분이었으며 일부 광산노동자도 있었다. 임금 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가장 대규모의 것은 1928년 5월 용인수리조합 노동자 쟁의였다. 그리고 용인에서는 식민지 기간 내내 이렇다 할 만한 노동 쟁의가 발생하지 않았다.

4. 청년운동

노동 운동·농민 운동·청년 운동 등의 대중 운동은 일제의 지배 구조 아래서 각각의 사회·경제적 이해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 지배 구조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정치 운동, 민족 해방 운동으로 성장해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청년 운동은 그 초기 단계에서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여타 지역과 비교하면 용인의 청년 운동은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청년 운동은 학생 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용인에는 조선인을 위한 중등 이상의 교육기관이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청년 운동의 성장에 일정한 제약으로 작용한 듯 하다. 192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사회주의 사상 등 신사상이 보급되고 노동·농민운동 등 대중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전국적인 청년 운동 지도기관인 조선청년총동맹이 1924년 결성되었다. 1920년대 용인에서 확인되는 청년단체는 11~12개 정도인데 기흥 지역이 가장 활발하였다.

용인에서 최초로 설립된 청년 단체는 1920년 9월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서 창립된 용흥청년회였다. 이후 일신친목회, 갑성회(甲星會: 이후 용인청년회로 개칭), 원삼면좌항진흥회, 낙은공조회, 이동남사면을 중심으로 한 이사청지회, 외사면의 백암청년회, 남사면의 남사청년회, 기흥면의 무진청년회, 내사면의 주동청년회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용인 지역 청년단체들의 등 계몽 활동이었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용인의 유지들과 결합하여 각종 초등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활동을 주로 하였다.

용인에서는 민족 해방 운동이 그리 활발하지도 않았고 청년 운동도 당시 전국적인 청년 운동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했다. 따라서 일제의 정책이 파쇼적으로 바뀌어가고 각종 민족 운동·사회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거나 개량화시켜 관제 조직으로 흡수해 갔던 1930년대 이후 용인의 청년 단체들은 대부분 부진한 활동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5. 소년운동

1920년대 이후 활발히 전개된 소년 운동은 어린이를 종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예우하려는 소년 해방·소년 보호 운동이었다. 1920년대 전국적으로 500여 개 이상의 소년 운동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경기 지방에도 100개가 훨씬 넘는 소년 단체가 있었다. 그러나 용인 지역에서 확인되는 소년단체는 경성애우소년학우회 용인지부, 마이프랜드소년회, 용인소년회 등 3개가 있다.

용인소년회는 용인청년회의 후원 아래 용인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소년운동을 전개한 단체로, 축구대회 및 동화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용인 지역 내 중등 이상의 교육기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소년운동의 역량이 곧바로 청년운동, 사회운동으로 연결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6. 야학운동

일제강점기 용인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된 사회운동은 보통학교 등의 설립을 중심으로 한 학교 설립 운동과 야학 운동이었다. 용인에서의 보통학교 설립 운동은 주로 각 면의 유지들과 일반 면민들의 직접적인 후원과 성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1910년대에 2개에 불과하던 용인 지역의 보통학교가 1920년 5월 5개로 늘어났으며 1933년 말 다시 11개로 늘어났다.

부족한 교육기관을 보충하기 위해 설립된 사설강습소로는 덕의강습소, 유신강습소, 용현강습소, 삼성강습소, 원삼강습소 등이 있었으며 용인 지역의 야학으로는 1920년대 용인청년회낙은공조회에서 설치한 야학부, 백암청년회에서 설치한 노동야학과 여자야학, 주동청년회에서 설치한 야학 등이 있었다. 그 외 명칭이 확인되는 야학으로는 갑성야학, 공조야학, 고삼면 유지 김동섭이 설립한 노동야학, 내사면 추계리에서 유지 송종헌이 설립한 야학, 내사면 제일리에서 이수영이 설치한 야학회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1.14 본문 수정 소학동에 소재했던 용인군청도 -> 읍내면에 소재했던 용인군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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