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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면 시위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135
한자 器興面示威運動
영어음역 Giheung-myeon Siwi Undong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in Giheung-m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수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3월 30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관련인물/단체 김구식(金九植)|김혁(金爀)

[정의]

1919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서 일어난 3·1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대 용인 지역 농민들은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 통치와 열악한 사회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용인 지역 3·1운동은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과 저항 의식이 독립 선언을 계기로 폭발하여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에 걸쳐 발생하였다.

[발단]

기흥면 시위운동은 3월 30일 김구식(金九植)과 김혁(金爀)이 주도한 시위는 원삼면 시위 당시 일제가 행한 무자비한 탄압이 발단이 되었다.

[경과]

1919년 3월 23일 갈천리에서 시위대가 태극기를 들고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3월 30일에는 하갈리에 거주하는 김구식이 탑안골 강변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들에게 만세 운동의 경과를 연설하고, 이어 김혁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가 시작되었다. 특히 김혁은 대한제국 장교 출신이었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이동하는 동안 계속 불어났으며, 면사무소 앞에서 면 직원들이 태극기를 치우려 하자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일본 헌병이 출동하자 시위대는 읍삼면으로 이동하여 연합 시위를 벌였다.

[결과]

3월 23일 기흥면에서의 시위는 수십 명이 체포되면서 강제 해산되었고, 3월 30일 시위는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발포로 시위대 두 명이 피살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김구식은 체포되었고, 김혁은 이 시위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기흥면 시위운동은 무자비한 일제의 탄압에 맞선 적극적 투쟁이었다. 또한 주도 인물이 대한제국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지방 3·1운동 주도 계층의 다양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3.11 [발단]수정 내용중 '3월 23일의 시위는 <지명>굴암사</지명> 승려들이 배포한 <서명>「독립선언문」</서명>과 전단이 발단이 되었으며'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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