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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064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음역 Dongnip Undongga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Fight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진갑

[정의]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이거나 용인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용인의 독립운동가는 의병부대 및 항일 무장단체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 밖에도 언론·외교 활동을 통해 국권 피탈의 상황을 국내외에 알려 독립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갔다.

[의병부대]

우선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보면, 용인 지역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약한 임옥여·정주원·이익삼 등의 의병장을 들 수 있다. 임옥여는 경기도 양지군 평촌 출신으로 농상공부 주사였으나, 1907년 8월 이천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주로 용인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옥여 부대에는 박춘식·유태수·홍금만·송금봉 등의 의병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다.

정주원은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하수리 출신의 농민으로 1907년 8월 서용범이 이끄는 부대에 투신하여 용인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으며, 이 후 의병대장이 되어 죽산·양지에서 활약하였다.

정주원 부대에는 1907년 9월 당시 900여 명의 의병이 몰려들었는데, 현재 확인되는 인원은 김사근·박덕삼·송교원·신현구·최국만·황면운·안춘경·조성습·신순중·한순팔·정대준 등으로 대부분 20~30대 농민 출신이다.

이익삼은 용인군 모현면 능동 출신으로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운동에 가담하여 의병장이 되었으며, 주로 용인·죽산·양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익삼의 부대 규모는 30~40여 명 이상이었는데, 김명화·김재천·남현수·신순용·이하경·정기인·정원경·조윤봉·강복선·남현수·김장옥 등이 현재 부대 소속원으로 확인된다.

이 외에도 임오교·이덕경·김순일·윤성필·정용대·윤관문 등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용인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을 기점으로 일제의 토벌작전이 진행되면서 의병 대부분이 피체되었다. 이 후 의병운동은 게릴라 형태로 진행되었다.

[해외 항일투쟁]

한편 해외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로 여준[1862~1936],김혁[1875~1936], 남정각[1897~1967]을 들 수 있다. 여준은 1906년 이상설 등과 서전의숙에서 활동했다. 1912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장을 지냈다. 1919년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 선언에 참여하였다. 서로군정서 부독판을 재냈으며 1932년 만주사변 와중에 별세했다. 김혁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1900년 1월 육군 참위로 임관, 육군정위로 군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항일투쟁을 결심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백두산 아래 화룡현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와 백두산 동북쪽 왕청현의 북로군정서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흥업단을 조직하여 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또 1922년 8월 30일에는 환인현남구마권자에서 8개 항일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하여 조직한 통의부의 군사부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초에는 북만주 지역으로 돌아와 현천묵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고, 조성환·나중소·김규식·이장녕·김필·권영준 등과 함께 참모로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과 함께 북만 영안현에서 재야 혁명가들을 모집하여 전북로군정서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를 조직하여 군인 양성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7년 2월 중동선석두하자에서 경리부원장 유정근과 본부 직원 김윤희·박경순·한경춘·남중희·이종순·이정하, 고문 남극 등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남정각은 용인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1919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여 갔다. 이 때 남정각은 한 살 아래의 김원봉을 장춘에서 처음 만나 알게 되었고, 그가 조직한 의열단원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에서의 대규모 암살과 건축 파괴 계획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1923년 함께 활동하였던 김시현·유석현 등의 의열단원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외에 언론 및 외교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전개한 인물로 이한응[1874~1905]·유근[1861~1921]을 들 수 있다.

이한응은 1892년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한성부주사와 관립영어학교 교관을 거쳐, 1901년 3월 영국 벨기에 양국주차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런던에 부임했다. 1904년에는 서리공사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일본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뒤이어 외국인 고문에 관한 협정을 맺어 청나라·미국·영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이에 이한응은 일제에게 국권이 박탈되어감을 통분하여 이를 항의하고 런던의 각국 공사들에게 한국이 독립국가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현실은 이미 한국의 외교권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였고, 이한응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일제의 국권 박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국민과 조정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1905년 5월 12일 런던에서 자결하였다.

유근은 1898년 5월 남궁억·나수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였다. 1905년 11월에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매국 관료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황제와 각부 대신들을 협박한 사실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1905년 11월 18일자 신문에 게재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인해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당하였다가 1906년 2월 속간되자, 유근장지연의 뒤를 이어 사장으로 취임한 뒤 지속적인 언론 활동을 펼쳤다.

한편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자강회에 가입하는 한편, 대한자강회의 강제해산 이후에는 대한협회(1907. 11.)를 발기하였다. 또 1907년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언론·출판·교육 부분에서 활동했으며, 박은식·김교헌 등과 함께 최남선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에서 민족 고전을 출판하는 일에 힘썼다.

또한 1908년에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초등본국역사(初等本國歷史)』·『신찬초등역사(新撰初等歷史)』를 저술하여 역사 교육에 진력하였으며, 종교계에 있어서도 민족종교의 진흥에 힘썼는데, 나철·오기호 등에 의하여 대종교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국권회복 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조선은 일제에 강제로 합방되었고, 『황성신문』은 폐간되었다. 이 후 유근은 여러 차례 일제에 체포되었다. 1917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선물산장려계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었을 때 이들을 지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또 1919년 3·1운동 이후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의 각료 선정과 정부체제 선택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될 때 언론계 원로로서 양기탁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언론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1921년 서거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8.21 [해외 항일투쟁] 수정 <변경 전> 김혁은 1875년 10월 대한제국 육군정위로 군무하던 중, <변경 후> 김혁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1900년 1월 육군 참위로 임관, 육군정위로 군무하던 중
2012.01.14 본문 수정 및 추가 1)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로 김혁[1875~1936]과 남정각[1897~1967]을 들 수 있다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로 여준[1862~1936], 김혁[1875~1936], 남정각[1897~1967]을 들 수 있다 2) 추가 여준은 1906년 이상설 등과 서전의숙에서 활동했다. 1912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장을 지냈다. 1919년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 선언에 참여하였다. 서로군정서 부독판을 재냈으며 1932년 만주사변 와중에 별세했다.
이용자 의견
김** 수정이 필요할 듯 하여 올립니다.
  • 답변
  • 디지털용인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8.21
김** 김혁은 1875~1936

1875년 10월 대한제국 육군정위로 군무하던 중,. . .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 답변
  • 디지털용인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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