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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조사사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145
한자 土地調査事業
영어음역 Toji Josa Saeop
영어의미역 Land Survey Project of the Yongin Are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수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11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5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기도 용인시

[정의]

1910년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실시된 일제의 토지 소유권 조사사업.

[역사적 배경]

일제는 러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면서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 1908년 「토지가옥소유권 증명규칙」 제정 등 토지 침탈을 위한 각종 제도적 정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만으로는 완전한 의미의 토지 소유권을 보장하고 토지를 상품화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등기 제도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한 소유권 조사가 필요했다.

또한 식민지 통치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지세 수입을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고, 조세 수입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토지조사사업이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1910년 8월 「토지조사법」을 공포하고, 9월에는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경과]

1911년부터 용인군양지군에 토지 신고서가 접수되었고, 이어 지주 조사, 경계 조사, 지목 조사, 지번 조사 등 토지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분쟁지 조사와 지가 조사가 진행되었다. 최종 단계로 용인군의 토지 소유권 사정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로 1915년 9월에 용인군 토지 대장이 만들어졌다.

[결과]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용인군의 밭과 논 그리고 대지의 규모는 1만 8,325정보로 대한제국기보다 7,500여 정보가 증가하였고, 민유지가 전체의 95.2%를 차지해 국유지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극소수의 대지주들은 소유 면적이 크게 늘어난 반면에 대다수 토지 소유자들은 영세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의의와 평가]

토지조사사업은 등기 제도가 도입됨으로써 조선에 근대적 토지 소유 관계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토지의 상품화가 크게 진전되어 일본 자본의 토지 침탈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일제는 지세 수입을 증대시켜 안정적인 식민지 통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용인군의 경우에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 면적이 증가함으로써 지세 부과의 대상이 그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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