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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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德里安東權氏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훈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있는 안동 권씨 복야공파 집성촌.
[개설]
광덕리 안동권씨 집성촌은 광덕리 교동마을에 있는 안동권씨 세거지이다. 안동권씨는 경상북도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원래 성씨는 김씨였다. 권행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고려 태조에게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라는 작위를 받고,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함]’하다는 뜻으로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명칭 유래]
광덕1리의 자연마을 중 교동과 읍동은 각기 향교와 읍치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교동(향교마을), 읍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광덕1리 지역의 옛 이름은 신한(新漢)이다. 물 위에 있는 동네라 하여 한상(漢上)이라고도 하였으며, 한양과 닮았다 하여 새로운 한양이란 의미에서 신한이라 하였다. 동서로 광덕1리와 광덕2리를 나누는 반변천의 옛 이름은 신한천(新漢川)이다. 마을 북쪽의 광덕산은 18세기까지 두우산(斗牛山)이란 이름으로 표기하였고 19세기에는 두음산(斗蔭山)이라 하였으나, 산이 광대하다고 하여 광덕산(廣德山)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지명인 광덕은 광덕산 아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광덕리는 조선 태종 때 이후 백씨와 안씨가 개척하였고, 세종 때인 1437년에 진보의 읍치가 진안리에서 광덕리로 옮겨졌으나, 1440년에는 다시 진안리로 읍치가 옮겨졌다. 조선 명종 때인 1545~1567년 무렵에는 안동권씨가 입향하였는데, 입향조인 귀암(歸巖) 권덕조(權德操)는 자신의 종숙이자 스승인 충제(冲濟) 권벌(權橃)이 1545년 일어난 을사사화로 인해 유배된 것에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입거하였다. 1871년경에는 진안에서 광덕으로 재차 읍치가 옮겨졌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한동과 읍내동 일부를 병합하여 광덕리가 되었다.
광덕리의 안동권씨 가구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95가구, 1992년에는 79가구이었으며, 2017년 현재는 약 4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자연환경]
진보면 소재지 북쪽의 반변천 건너에 있는 광덕1리는 북으로 광덕산이 솟아 있고, 광덕 1리의 남쪽과 동쪽을 감싸고 있는 반변천 동쪽에는 양정마을이 있었던 광덕2리가 있다. 과거 두 차례 읍치가 옮겨왔던 것은 광덕산과 반변천 사이에 위치한 광덕1리의 풍수적 조건이 크게 작용하였다. 반변천과 서시천으로 둘러싸여 산과 강으로 다른 곳과 분리되어 있는 광덕2리는 1980년 교정시설이 설치됨에 따라 그곳에 있던 자연미을인 양정마을이 해체되었다.
[현황]
2017년 현재 광덕1리의 가구 수는 약 90호이며, 그중 안동권씨는 약 40호이다. 마을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는 약 200호였으며, 가구의 대부분이 안동권씨였다고 한다. 문중활동은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지는 않으나, 마을 내의 권씨 분파별로 제사 등을 지낸다. 광덕1리에는 안동권씨 입향조 권덕조를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귀암정(歸巖亭)과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과 함께 의진에 참여하여 화왕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송만(松巒) 권준(權晙)의 공을 기리는 송만정(松巒亭)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