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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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6년 1월 8일 - 「이경여와 대재각 정자」 부산각서석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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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3년 3월 13일 - 「이경여와 대재각 정자」 부여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부여군지』에 수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이경여와 대재각 정자」 부산각서석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
관련 지명 | 대재각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산3-1 |
채록지 | 신리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이경여 |
모티프 유형 | 역사 인물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의 대재각과 조선 전기의 문신 이경여와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
[개설]
「이경여와 대재각 정자」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에 있는 대재각(大哉閣)과 조선 전기 문신 이경여(李敬輿)[1585~1657]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대재각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인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을 기리며 이경여의 후손이 세운 정자이다. 부산각서석은 이경여가 임금에게 받은 답서의 내용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글로 남기고 후손들이 바위에 새긴 암각문이다.
[채록/수집 상황]
「이경여와 대재각 정자」는 2003년 3월 13일 부여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부여군지』에 수록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서 마을 주민이 구술한 내용이 채록된 것이다.
[내용]
옛날 조선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한 이후, 뒤를 이어 태자로서 볼모가 되어 중국에 다녀온 효종(孝宗)이 왕위에 올랐다. 효종 대 유명한 신하로는 무관인 이완(李浣)이 있었고, 백강(白江) 근처에 영의정을 지내다가 물러난 이경여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경여는 ‘보은 대감’이라고도 불렸는데, 사는 곳의 이름을 따서 ‘백강 대감‘이라고도 불렸다. 신선술을 부릴 수 있어서 부여에서 서울을 눈 깜짝할 사이에 왕래하기도 하였다. 이경여는 항상 효종에게 청나라를 치자고 말하였다. 효종 역시 볼모로 잡혀 있던 경험을 하였으므로 항상 군량미와 무기를 준비하고자 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을 거친 상태라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어느 날 이경여가 강가에서 배를 타고 있는데, 나라에서 임금의 첩서가 내려왔다. 배 위에서 임금의 첩서를 바로 받을 수가 없어서 이경여는 배에서 내려 돌 위에 임금의 첩서를 놓고 북향사배(北向四拜)를 한 뒤 임금의 말을 전하여 들었다. 첩서 중에는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이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지극한 비통함이 가슴에 서려 있으나,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이었다. 뒷날에 송시열이 뜻을 기리기 위하여 글씨를 써 주었는데, 이경여의 자손들이 글씨를 옮겨다가 돌에 새기고 대재각을 세웠다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이경여와 대재각 정자」에는 병자호란 이후 척화파(斥和派)였던 이경여라는 역사 인물을 모티프로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임금과 함께 난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던 인물과, 임금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는 답서와 관련된 일화를 통하여 지역민들의 역사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