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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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黑齒常之 |
이칭/별칭 | 항원(恒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출생 시기/일시 | 630년 - 흑치상지 출생[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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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660년 - 흑치상지 백제부흥운동을 이끌다 당의 회유로 항복 |
활동 시기/일시 | 664년 - 흑치상지 절충도위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672년 - 흑치상지 충무장군, 행대방주장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678년 - 흑치상지 좌무위장군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684년 - 흑치상지 좌무위대장군, 검교좌우림군으로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687년 - 흑치상지 겸국공, 우무위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689년 - 흑치상지 사망[추정] |
추모 시기/일시 | 698년 - 흑치상지 좌무위위대장군 검교좌우림위 상주국 연국공 복구 및 좌옥검위대장군 추증 |
묘소|단소 | 망산 -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망산 |
성격 | 장군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달솔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수도로 한 백제 사비 시기의 장군.
[가계]
흑치상지(黑齒常之)[630~689]의 어릴 적 이름은 항원(恒元)이다. 선조의 성씨는 부여씨(扶餘氏)였는데, 흑치(黑齒) 지역에 봉해졌으므로 흑치로 바꾸었다. 증조할아버지는 흑치문대(黑齒文大), 할아버지는 흑치덕현(黑齒德顯)이며, 아버지는 흑치사차(黑齒沙次)이다.
[활동 사항]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西部) 출신이며, 벼슬이 제2품 달솔(達率)에 이르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키가 7척[대략 170㎝]을 넘었으며 날쌔고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다. 660년(의자왕 20) 가을,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도 풍달군 군장으로서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에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 노략질하자, 주변의 따르는 인물들과 함께 임존산(任存山)[현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들어가 스스로 굳게 지키니, 열흘도 지나지 않아 합세하는 사람이 3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곧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이에 당나라 고종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니 흑치상지가 유인궤(劉仁軌)에게 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
흑치상지는 백제부흥운동 세력을 공격하여 항복시킴으로써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이 무렵 흑치상지는 사비에 설치된 당의 웅진도독부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로부터 664년 절충도위(折衝都尉)라는 벼슬을 받고 웅진성(熊津城)에 주둔하였다. 672년에는 공적에 따라 충무장군(忠武將軍),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사지절(使持節), 사반주제군사(沙泮州諸軍事), 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로 승진하고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았다. 이후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겸 웅진도독부사마(熊津都督府司馬)가 되었으며, 부양군(浮陽郡) 개국공(開國公)과 식읍 2,000호를 더 받았는데, 정2품에 해당한다.
678년경에는 돌궐과의 전투에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로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 되었다. 다시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摠管)에 임명되었다. 684년에는 서경업(徐敬業)의 모반을 평정하여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과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으로 승진하였다. 687년에는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으로서 돌궐을 쳐서 공을 세워 겸국공(兼國公)과 식읍 3,000호를 받고 다시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라는 벼슬을 받았다. 당나라 품계에서 종1품에 해당한다.
그 뒤 흑치상지는 회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찬보벽(爨寶壁)과 함께 돌궐을 토벌하였는데, 찬보벽이 무리한 공격으로 크게 패하자 흑치상지도 연루되어 공이 없어졌다. 그리고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인 689년에 혹리(酷吏)로 유명한 주흥(周興) 등의 무고를 받아 조회절(趙懷節)의 반란에 연루된 죄로 죽었다. 교수형설과 자살설이 있는데, 사형이 확정된 죄인의 신분으로 감옥에서 자살하여서 생긴 설일 듯하다.
[묘소]
1929년 10월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망산(邙山)에서 흑치상지와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묘지(墓誌)가 발견되었다. 모두 무덤에서 출토된 것인데, 무덤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흑치상지의 묘지는 개석(蓋石)이 사라진 상태로 지석(誌石)만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로 옮겨졌다가 나중에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으로 이관되었다. 지석의 크기는 가로 71.5㎝, 세로 72.7㎝, 두께 14㎝로 알려져 있다. 지석의 가장자리 일부는 깨져서 글자 판독이 어려우며, 전체 글자는 41행 41열 1,604자이다. 묘지는 699년 흑치상지의 무덤을 다시 만들 때 작성하였으며, 지은이와 글쓴이는 밝히지 않았으나 군대에서 흑치상지와 함께 활동한 사람이 찬술한 것으로 추정한다. 흑치상지 묘지명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630년(무왕 31)경에 태어나서 689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흑치상지는 죽은 지 10년째인 698년 맏아들 흑치준(黑齒俊) 등의 노력으로 억울함이 인정되어 죽기 전의 관직인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檢校左羽林衛)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을 되찾았다. 그리고 영혼을 위로하는 뜻에서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을 더하여 주고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