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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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穀 |
영어공식명칭 | I Gog |
이칭/별칭 | 이운백(李芸白),중부(仲父),가정(稼亭),문효(文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정규완 |
[정의]
고려 후기 부여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기행문을 남긴 성리학자이자 문신.
[가계]
이곡(李穀)[1298~1351]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초명은 이운백(李芸白), 자는 중부(仲父), 호는 가정(稼亭),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한산 이씨(韓山 李氏)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증판도판서(贈版圖判書) 이창세(李昌世)이다. 아버지는 증도첨의찬성사(贈都僉議贊成事) 이자성(李自成)이고, 어머니는 흥례부(興禮府) 이춘년(李椿年)의 딸이다. 아들은 고려 후기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목은(牧隱) 이색(李嗇)이다.
[활동 사항]
이곡은 1298년(충렬왕 24)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인 한산에서 태어났다. 1317년(충숙왕 4)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 1331년(충혜왕 2)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승진하였다. 이후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고 1333년에는 황제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한 뒤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원의 문사(文士)들과 교류하며 학문과 문장을 갈고닦았다.
1334년(충숙왕 복위2) 고려로 귀국하여 시가선대부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에 제수되어 학교를 진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335년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이후 고려로 돌아와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하였다. 이후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1351년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곡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이곡이 고려 말에 지은 「죽부인전(竹夫人傳)」은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죽부인의 절개를 표현한 가전체 작품이다.
이곡의 문학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문집 『가정집(稼亭集)』에는 전국 각지를 시제(詩題)로 한 기행문이 많이 실려 있다. 이곡은 부여 지역을 유람한 내용을 글로 남겼다. 『가정집』 권5에 수록되어 있는 「주행기(舟行記)」는 문헌에 나타난 부여 기행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주행기」는 1349년(충정왕 1) 5월 16일 이곡이 한산의 원산(圓山)[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을 출발하여 3일간 낙화암, 조룡대(釣龍臺), 호암사(虎巖寺), 천정대(天政臺) 등 부여의 명승지 4곳을 유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곡은 「주행기」에서 낙화암과 백제의 궁녀, 조룡대 등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 사실 등을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이곡의 「주행기」를 통하여 부여는 당시 선비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묘소]
이곡의 묘소는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10-1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