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514
한자 內山 尹集 墓 - 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온해로 94-6[온해리 산19-5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06년 - 윤집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37년 - 윤집 사망
조성 시기/일시 1671년연표보기 - 내산 윤집 묘 및 신도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1월 3일연표보기 - 내산 윤집 묘 및 신도비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50호 지정
현 소재지 내산 윤집 묘 및 신도비 -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온해로 94-6[온해리 산19-50]지도보기
성격 능묘|비
관련 인물 윤집
봉분 크기/묘역 면적 높이 208㎝, 너비 79㎝, 두께 45㎝[신도비]|높이 143㎝, 너비 75㎝, 두께 27㎝[묘갈]
소유자 남원 윤씨 종중
관리자 남원 윤씨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50호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윤집의 묘와 신도비.

[개설]

윤집(尹集)[1606~1637]은 1631년(인조 9)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수찬, 사헌부헌납,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윤집은 자가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 고산(高山)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을 때 최명길 등이 화의를 주장하자 오달제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전란 이후 척화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청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이후 윤집은 오달제·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라고 불렸으며, 윤집에게는 충정(忠貞)의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내산 윤집 묘 및 신도비는 2001년 1월 3일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내산 윤집 묘 및 신도비는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온해로 94-6[온해리 산19-50]에 있다. 오른쪽에는 아들 윤이선의 묘가 있으며, 아래에는 후손들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변천]

내산 윤집 신도비 비문에 따르면 윤집이 사망한 뒤 35년이 지난 1671년(현종 12) 비로소 묘를 갖추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조성 시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형태]

내산 윤집 묘 앞에는 정유년(丁酉年)에 세워진 묘갈(墓碣)이 있는데,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사다리꼴 모양이며, 묘갈의 크기는 높이 143㎝, 너비 75㎝, 두께 27㎝이다. 묘갈 전면에는 부인 안동 김씨와 합장하였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후면에도 명문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묘 앞에는 좌우로 한 쌍의 망주석과 동자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높이 208㎝, 폭 79㎝, 두께 45㎝의 규모이다. 비는 사각형의 화강암 대좌 위에 흑요암으로 만든 비신(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형태의 머릿돌을 올린 구조이다. 대좌는 1단의 굄을 만들고 비신을 받치기 위하여 요(凹) 형태의 홈을 팠다.

[금석문]

내산 윤집 신도비에는 4면에 걸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윤집의 생애와 가족 관계, 관직 생활 등이 적혀 있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의 활동과 청에 끌려간 뒤의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윤집의 절의와 대의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비문의 내용은 송시열(宋時烈)이 작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내산 윤집 묘 및 신도비는 조선 후기 절의를 굽히지 않은 윤집과 후손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으며, 신도비와 묘갈에는 명문이 남아 있어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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