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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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餘 鄭得說 墓- 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안로7번길 20[능산리 산30-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행묵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정득열의 묘와 비.
[개설]
정득열(鄭得說)[?~1592]은 본관이 하동(河東)이며, 자는 군석(君錫)이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이다. 정득열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왜적 1만여 명이 진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민병 300여 명을 모아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선봉이 되어 출전하였다. 1592년 8월에는 김시민과 힘을 합쳐 사천·고성·진해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10월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기 위하여 싸우다가 유숭인이 먼저 전사하자 군졸을 수습하여 끝까지 싸우다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739년(영조 15) 공로를 인정받아 훈련원정에 추증 및 정려되었다. 1807년(순조 7) 가증(加贈)하여 승지로 증직되었다. 부여 정득열 묘 및 비는 2001년 1월 3일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48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부여 정득열 묘 및 비는 1760년(영조 36) 10월 세워졌으며 비문은 홍문관 응교 윤광소가 찬하고 승정원 동부승지 이심원이 썼다.
[위치]
부여 정득열 묘 및 비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안로7번길 20[능산리 산30-1]에 있다.
[형태]
부여 정득열 묘비는 사각형의 대좌 위에 탑신을 세우고, 위에 지붕돌을 얹은 구조이다. 묘비의 높이는 180㎝이며, 탑신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묘비는 봉분 앞쪽 왼쪽에 있다.
[금석문]
부여 정득열 묘비 앞면에는 ‘충신(忠臣) 증훈련원정(贈訓鍊院正) 행사천현감(行泗川縣監) 정공득열지묘(鄭公得說之墓) 숙인진주강씨(淑人晉州姜氏) 부좌(祔左)’라고 새겨져 있어 정득열과 부인이 함께 묻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뒷면과 옆면에는 묘갈명이 새겨져 있는데 상단 부분은 마멸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대체로 임진왜란 시기 정득열의 활약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숭정기원후백십육년 경진 십월일립(崇禎紀元後百十六年 庚辰 十月日立)’이라고 되어 있어 1760년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부여 정득열 묘비는 봉분과 함께 있으며, 봉분 바로 앞에는 새로 만든 묘표와 상석, 향로석이 있다. 묘비 근처에는 옛 망주석과 새로 만든 무인석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부여 정득열 묘 및 비 위쪽으로는 6대조 정흥인의 부여 정흥인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부여 정득열 묘 및 비로 임진왜란 시기 순절한 충신 정득열의 활동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여 정득열 묘 및 비는 부여 지역에 세거한 하동 정씨의 존재와 장례 문화를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