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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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헌주 |
[정의]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이후부터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시기까지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의 역사.
[개설]
서세동점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던 대원군 집권기는 1873년 고종의 친정으로 막을 내렸다. 고종이 집권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근대화 팽창 정책을 펴던 일본의 포함 외교가 맞물리면서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다. 조일수호조규로 조선은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 화폐의 통용을 허가하는 등 일본과 근대적 통상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오랜 기간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무역 체제에 편입되어 있던 상황에 균열을 냈다.
이후 조선은 근대화 정책으로 인한 변화와 저항이라는 흐름이 동시에 이어졌다. 개항과 여러 국가들과의 조약 체결, 갑신정변, 갑오개혁은 근대화의 큰 흐름이었고, 임오군란과 동학 농민 운동, 의병운동은 근대화에 저항하는 흐름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종은 국외 중립과 전제 군주제에 입각한 근대화 노선을 채택하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성립한다. 그리고 광무개혁이라 불리는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변화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한반도에서 패권을 장악한 일본에 의하여 식민지적으로 변용된다. 1905년 을사조약과 곧 이은 통감부 설치, 1907년 정미칠조약과 고종 강제 퇴위, 1910년 대한제국 강제 병합은 일제 식민지화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부여 지역에도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근대 부여의 행정 구역 개편 과정]
조선 시대 부여 지역은 1읍 15면으로 이루어진 현재 부여군과는 달리 임천군, 부여현, 석성현, 홍산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임천군, 부여현, 석성현은 공주목의 관할하에, 홍산현은 홍주목의 관할하에 있었다. 조선 초기 태종 대 지방 제도 개편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조선 초기에 정비된 부여 지역의 군현 편제는 조선 중기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 잠시 혁파된 홍산현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후 개항기 갑오개혁에 의하여 8도제에서 23부제로 변경되면서 부여 지역은 모두 군으로 승격하였다. 임천군과 홍산군은 홍주부에, 부여군과 석성군은 공주부에 속하게 되었고, 1896년 지방 제도가 다시 13도제로 변경되면서 모두 공주부에 속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이 진행되면서 홍산현·임천군 전역과 석성현·공주군 일부를 편입하여 16개 면으로 이루어진 부여군이 형성되었고, 1960년 부여면이 부여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행정 구역 개편 과정을 거쳐 1읍 15면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부여군이 형성되었다. 부여군을 이루고 있는 1읍 15면은 부여읍(扶餘邑)과 규암면(窺岩面), 은산면(恩山面), 외산면(外山面), 내산면(內山面), 구룡면(九龍面), 홍산면(鴻山面), 옥산면(玉山面), 남면(南面), 충화면(忠化面), 양화면(良化面), 임천면(林川面), 장암면(場岩面), 세도면(世道面), 석성면(石城面), 초촌면(草村面)이다.
[부여의 국권 회복 운동]
근대 부여 지역에서도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일본은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을 계기로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을 지속하고 있었다. 1904년 2월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간섭과 군사 기지 사용권 허가를 골자로 한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다. 1904년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재정고문과 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무고문을 고용하게 함으로써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심지어 1905년 11월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후 일제는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고문 정치를 통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여 갔다. 이런 정세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실력 양성론에 입각하여 교육과 식산 흥업 운동에 매진하였던 계몽 운동과 무장 투쟁론에 입각하여 일본의 침략에 무력으로 저항하였던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땅에 근대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 일부 개화 지식인들이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면서부터였다. 광무개혁 시기 학부(學部) 주도로 전국 각지에 국공립 학교가 설립되고, 민간에서도 애국 계몽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국권갱생(國權更生)의 길은 오직 교육밖에 없다’는 이념하에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정책이 펼쳐졌다. 개항기 부여에 밀어닥친 근대 물결의 진원지 역시 근대 학교였다.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지역의 근대 교육시설이 설립되었는데, 근대 교육 시설은 개인 및 단체에 의한 민족 사학과 국가에 의한 관학으로 나타났다. 부여 지역의 근대 교육 시설로는 소양의숙·신명의숙·부흥의숙 등과 같이 공익을 위하여 의연금을 모아 세운 교육 기관인 의숙(義塾)과, 1908년 설립된 석성의 석성관, 1909년 설립된 홍산의 한흥학교와 임천의 가림학교가 있다. 이 외에도 민족계 사립 학교인 건명학교, 동창학교, 창영학교를 설립하여 개화 사상을 수용함과 동시에 민족 주체성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을 펼치고자 하였다.
근대 학교는 애국 계몽 운동이 한창이던 1900년대 중반에 많이 설립되었다. 1908년 부여 지역에 존재한 사립 학교 수는 무려 11개였으며, 전체 교원 수는 23명, 학생 수는 415명으로 확인된다. 당시 근대 교육에 열의를 보인 이들은 대부분 읍치 지역의 아전이나 상인, 혹은 일반 상민 출신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1906년 통감부가 「소학교령」을 폐지하고 「보통학교령」을 공포하고, 1908년 「사립학교령」을 통하여 사학의 구국 운동을 제지함에 따라 부여 지역의 민족 사학은 식민지 교육 정책에 따라 보통학교와 통폐합되거나 강제 폐교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부여 지역에서는 다양한 계몽 운동이 펼쳐졌으며, 이에 따라 많은 애국지사가 참여하였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설립된 대한협회의 지회가 1909년 3월 부여에 설립되었다. 1909년 서울 경신중학교 교사 재직 중 청년학우회 회장으로 활동한 김도희는 신민회가 주도한 서간도 망명 계획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부여 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되었다. 국채의연소와 단연동맹회를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채의연소는 홍산군수 이중현 등을 중심으로 수백 명이 참여하였다. 국채의연소의 의연 모금은 224원 정도였다. 민준식 등이 주도한 단연동맹회는 회원 수가 140명 정도였고 75원을 모급하였다. 부여 초춘면 고추동 이준려 문중, 홍산분파소의 순검, 석성의 삼산학교, 중산기독교회 등이 모두 의연금을 보태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부여 지역에서는 의병 활동도 일어났다. 부여 지역 인물들이 의병 활동에 나선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였다. 부여 지역 유생들은 인근 지역 유생들과 합세하여 공동 의진을 결성하고 의병운동에 나섰다. 부여인들과 밀접한 의병 부대는 홍주의병이다.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14일 예산의 광시에서 봉기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청양의 합천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안병찬 등이 체포되면서 패배하였다. 패배 후 흩어졌던 홍주의병은 부여 출신이자 홍주의병을 주도한 민종식의 처남인 이용규가 합천 전투에서 패한 뒤 전주, 진안, 장수, 무주, 익산, 군산 등지를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는 활약에 힘입어 5월 9일 부여에서 재봉기하였다. 홍주의병은 서천 지역과 남포, 결성 등을 지나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격퇴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2개 중대가 홍주로 파견되었고, 전주 지역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서 파상공세를 이어 가다 결국 홍주성을 내주었다.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한 부여인으로는 이용규 외에 은산면 합수리 출신의 홍순대, 이용규의 매제인 은산면 장벌리 출신의 조병두, 부여읍의 송순묵, 임천면 발산리 출신의 이한구 등이 있다. 그 외에 부여 출신 의병 참여자는 이규철과 신봉만, 이성택, 이성우, 박덕근, 김판돈, 이박원, 정관신, 김광옥, 이성법, 한학삼, 한성수, 한사용, 한기안, 권운택, 이덕현, 정용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