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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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공식명칭 | Imjin War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엄기석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개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 4월 일본군의 부산진 상륙부터 1598년(선조 31) 11월 노량해전까지 7년 동안 조선과 일본, 명 사이에 일어난 동아시아 국제 전쟁을 말한다. 부여 지역의 경우 임진왜란 기간 동안 석성면 석성리에 있는 석성향교(石城鄕校)가 소실되었고, 강화 교섭의 결렬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발발 이후에 부여 지역까지 침입한 일본군에 의하여 양민이 학살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말 일본은 지방의 영주들이 세력 다툼을 하던 전국 시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하여 끝이 났다. 전국 시대의 혼란기를 평정하고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 안정을 위하여 내전 과정에서 축적되어 있었던 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발산하고, 중국과 무역 개시 등을 이유로 조선의 침입을 결정하였다.
조선은 선조[재위 1567~1608]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웠고, 재정 역시 방납(防納) 등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며 어려워졌다. 군역은 납포(納布)가 성행하였고 지방의 군사 조직인 진관 체제 등의 국방 제도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지 오래여서 일본의 침략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590년(선조 23) 조선 정부에서는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등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1591년 일본에서 돌아온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과 군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장차 반드시 침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반면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준비된 군사가 없었다고 보고를 하였다. 통신사의 엇갈린 보고로 조선 정부가 제대로 된 방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들여온 조총을 대량 생산하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제1대가 부산진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 상주까지 진출하였다. 상주에서는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일본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충주에서 신립(申砬)이 이끄는 군대 역시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은 사태가 점차 악화되자 결국 파천(播遷)을 결정하고 한양을 빠져나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하지만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고 개성까지 함락되자 결국 평양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왕실과 조정을 옮겼다.
그사이 패퇴한 관군을 대신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부여 지역에서는 전투가 직접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관리로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여타의 고을과 같이 사족(士族)들이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부여 지역의 의병 활동은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관리로서 참전한 경우로서 부여 지역에서는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조헌(趙憲)의 문인으로서 조헌을 따라 의병으로 참전한 경우이다. 부여 지역 의병들은 일본군을 맞아 지역을 수호하는 활약을 펼쳤다.
남해안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수군이 1592년(선조 25) 5월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연전연승하였다. 특히 1592년 7월 한산도 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사실상 남해안의 재해권을 장악함으로써 바다를 통한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 조정은 피난 도중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원병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은 의견 대립이 있었으나 1592년 12월 이여송(李如松)에게 동정제독(東征提督)을 제수하고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조선에 도착한 명나라 원병은 조선 관군, 의승군과 함께 1593년 1월 평양성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계속 남하하면서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결국 일본군은 1593년 한양 도성에서 철수하였다. 명나라는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일본군과 계속해서 화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1597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재침입 명령과 함께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전라도를 거쳐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이때 부여 지역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었다. 1597년(선조 30) 9월에는 임천과 한산 등지에 일본군이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은진, 부여, 석성에도 일본군이 쳐들어와 홍산의 무량사, 부여의 도천사, 은산역 등이 피해를 입었다.
이후 조명 연합군이 충청도 직산에서 방어에 성공하면서 일본군의 북상이 차단되었다. 백의종군하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본군의 바다를 통한 진출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일본군은 다시 남해안으로 물러나 울산에서 순천까지 방어선을 구축한 뒤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결과]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남해안에서 대치하던 중 1598년(선조 31)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면서 일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1598년 11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을 받고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병선이 노량을 침입하였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를 ‘노량 해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일본군은 많은 피해를 봤지만 퇴각에 성공하였다. 노량에서의 전투를 끝으로 7년 동안의 전쟁은 끝이 났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크게 바꿔 놓았다. 우선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였던 조선은 7년이라는 기간 동안 크나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농지 대부분이 유실되었고, 많은 백성이 사망하여 인구가 크게 줄었으며, 토지 대장과 호적 등의 공공 서류가 소실되어 세금을 효율적으로 거둘 수 없게 되면서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또한 왕궁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 시설이 파괴되면서 복구하는 데도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부여 지역도 피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1597년(선조 30) 일본군의 침입과 약탈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고, 무량사와 도천사 등의 사찰과 군현 내 향교 등이 병화로 소실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워졌다.
명은 조선에 파병을 하면서 국력을 손실하여 당시 성장하던 후금의 침략에 시달리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빼앗겼다. 명의 조선 파병은 명이 후금에 의하여 멸망하는 데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탈한 활자, 그림, 도자기 등 문화재를 기반으로 문화적 발달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