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22
한자 古多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엄기석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나루.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다진(古多津)은 조선 시대 임천군(林川郡)석성현(石城縣) 사이 금강가에 있는 나루[진도(津渡)]로 현제의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에 있다. 위치는 임천군에서 동쪽으로 29리[약 11.39㎞], 석성현에서는 서쪽으로 10리[약 3.93㎞]에 있었으며, 임천군석성현을 잇는 교통로 상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수세가 매우 험하다고 하였다는 점을 봐서는 강을 건너는 일이 수월하지 만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육상 교통과 수상 교통이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지리상 요충지로 여겨졌으며, 1414년(태종 14) 이산현(尼山縣)과 석성현이 병합된 이후에 고다진의 지리적 중요함으로 인하여 석성현이 1416년(태종 16) 다시 분리되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世宗實錄)』 149권, 지리지 충청도에 “고다진(古多津)[수세(水勢)가 험악해서 조금만 풍랑이 있어도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며, 늘 나룻배가 있다]”, “본조 태종 14년(1414) 갑오에 이산(尼山)에 합쳐서 이성(尼城)으로 고쳐 부르다가, 을미에 고다진에 왕래하는 요충이 되므로 다시 석성 현감을 두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이긍익(李肯翊)이 편찬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리전고(地理典故) 중 공주(公州)의 금강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금강은 옥천(沃川)의 적등진(赤登津)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보은(報恩)과 청산(淸算) 물줄기와 합쳐져서 화인진(化仁津)이 된다. 회인을 지나서는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문의로 흘러서 이원진(利遠津) 혹은 형각진(荊角津)이 된다. 계속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청주(淸州)의 작천(鵲川)이 되었다가 공주 북쪽에서 금강이 되고, 남으로 꺾어져 부여에 이르면 백마강(白馬江)이 된다. 그리고 서쪽으로 꺾어져서 이때 석성의 고다진·임천의 남당포(南堂浦)가 되며 이후에는 한산(韓山)의 상지포(上之浦)·서천(瑞川)의 진포(鎭浦)가 되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전한다. 이긍익의 기록을 보면 진(津)이라는 명칭이 단순히 나루를 뜻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천의 구간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는 고다진과 관련하여 “고다원(古多院) 군 동쪽 25리에 있다”라는 기록, “고다나루[古多渡] 군 동쪽 29리에 있다. 일명 고성진(古城津)이라고 한다. 길이 석성과 이산(尼山)으로 통하고, 물살이 사납고 급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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