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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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城縣 |
영어공식명칭 | Seokseong-hyeon |
이칭/별칭 | 진악산(珍惡山),석산(石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엄기석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에 있었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석성현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지역에 설치되었다. 석성현은 백제 때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다가 통일 신라 이후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석산현(石山縣)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부여군의 속현이었다. 고려 초 940년 석성현(石城縣)으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부터 공주에 예속되었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監務)가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하였고, 1353년(공민왕 2) 부여감무로 지방관을 겸임하게 하였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별도의 감무를 두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이후 1414년(태종 14) 이산(尼山)과 병합하여 이성(尼城)이라고 불렀고 공주목의 관할 아래 두었다. 1415년(태종 15) 고다진(古多津)이 요충지이기 때문에 그와 왕래하는 교통로에 있는 석성은 다시 현으로 복구하여 현감(縣監)을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는 읍격이 현으로 유지되었고,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과정에서 석성군으로 변경되었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에서 석성현(石城縣)은 계룡산 서남쪽에 위치한 고을 중에 하나로 땅이 기름지고 산이 웅장하며 백성이 부유하고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라고 하였다. 다만 석성현은 은진(恩津)과 함께 땅이 말라 수재와 한재를 여러 차례 당한다고도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석성현의 풍속에 대하여 온순하며, 검소함을 숭상한다고 표현하였다.
[내용]
석성현은 진악산(珍惡山)·석산(石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석성현에는 종6품의 현감(縣監)이 파견되었고, 종9품의 훈도(訓導)가 현감을 보좌하였다. 석성현의 위치를 살펴보면 동쪽으로 이산현, 남쪽으로 은진현, 서쪽으로 임천군, 북쪽으로 부여현과 인접하여 있었다. 석성현 내에는 18세기 중반 편찬된 『여지도서』를 기준으로 현내면(縣內面)·북면(北面)·증산면(甑山面)·비당면(碑堂面)·원북면(院北面)·정지면(定之面)·삼산면(三山面)·병촌면(甁村面)·우곤면(牛昆面)의 9개 면이 있었고, 각 면 내에는 포촌리(鮑村里)·옹점리(瓮店里)·포전리(浦田里)와 같은 동리들이 편성되어 있었다.
지역 내 토성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기준으로 이(李)·노(盧)·정(鄭)·백(白)·석(石) 씨와 이주하여 온 속성(續姓)으로 박(朴)·이(李) 씨가 있었다. 조선 후기 『여지도서』에는 강(姜)·김(金)·조(趙)·여(呂)·유(柳)·인(印)·강(康)·변(邊)·남궁(南宮)·전(田)·윤(尹)·장(張)·빈(賓)·홍(洪)·권(權)·설(薛)의 16개 성씨가 새롭게 등장하고, 기존에 있었던 노(盧)·백(白)·석(石)·이(李)의 4개 성씨가 빠졌는데, 그 사이 지역 내 사족 집단의 이탈과 새로운 세력의 유입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성씨가 대거 유입되고 빠져 나가는 것은 석성현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하여 기존 토착 세력의 힘이 크지 않았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석성현의 경제적 상황을 19세기 중반 자료인 『호서읍지(湖西邑誌)』를 통하여 살펴보면 우선 토지가 원장부(元帳付) 기준 3,081결이고, 그중에서 한전(旱田)은 1,541결, 수전(水田)은 1,540결이었다. 군현 내 민호는 1,769호이고 인구는 8,992구로 집계되었다. 환총은 먼저 1864년(고종 1) 합록미(合錄米)가 402석, 내하(內下) 별비미(別備米)는 200석, 호조에 속한 별비미는 985석으로 총 1,587석이었다. 이 외에도 석성현의 군역 현황을 살펴보면 훈련도감 포수보(砲手保) 39명, 군향보(軍餉保) 14명, 병조 기병 160명, 보병 75명 등 경안부(京案付)에 오른 인원이 총 923명이었고, 지방군으로는 수영 수군 130명, 감영에 속한 아병 5명 등 외안부(外案付)에 총 460명이 올라 있었다.
지역 내 관영 시설로 먼저 국가에서 운영하는 교통역은 없었으며, 대신 여행자의 숙박 등 편의를 돕는 시설인 원으로 수탕원(水湯院)·임강원(臨江院)이 석성현 내 교통로에 있었다. 교육 시설로는 향교가 있었으며, 서원은 없었다. 그 밖에 사직단·문묘·성황사·여단이 설치되어서 군현 내 종교 시설로 기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