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351 |
---|---|
한자 | 石城邑誌 |
영어공식명칭 | A Town Chronicle Of Seoksu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승환 |
간행 시기/일시 | 1786년 - 『석성읍지』 간행 추정 |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599[신림동 산56-1] |
성격 | 읍지 |
편자 | 석성현 |
권책 | 1책 8장 |
규격 | 21.1㎝[가로]|30㎝[세로] |
[정의]
1786년경 편찬된 충청도 석성현의 읍지.
[개설]
『석성읍지(石城邑誌)』는 충청도 석성현[현 부여군 석성면]에서 파악한 전결(田結)·호구수(戶口數)·전세(田稅)·대동(大同) 등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여 편찬한 지방지이다. 읍지의 편찬 시기는 1786년경으로 추정된다.
[편찬/간행 경위]
『석성읍지』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786년경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책의 제목은 ‘석성현읍지’라고 되어 있다. 지도가 첨부된 필사본 『석성읍지』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세기 말경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901년 편찬하여 일제 강점기에 필사한 『석성읍지』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서지]
『석성읍지』는 1책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사본이며 규격은 가로 21.1㎝, 세로 30㎝이다. 지도는 첨부되어 있지 않다.
[구성/내용]
『석성읍지』의 전체 구성은 건치연혁(建置沿革)·형승(形勝)·관직(官職)·방리(坊里)·도로(道路)·산천(山川)·성씨(姓氏)·능침(陵寢)·단묘(壇廟)·풍속(風俗)·공해(公廨)·창고(倉庫)·물산(物産)·교량(橋梁)·역원(驛院)·목장(牧場)·관액(關阨)·봉수(關阨)·누정(樓亭)·사찰(寺刹)·고적(古跡)·진보(鎭堡)·인물(人物)·한전(旱田)·수전(水田)·진공(進貢)·조적(糶糴)·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봉름(俸廩)·군병(軍兵)으로 구성되어 있다.
체제는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유사하며, 능침·역원·목장·관액·봉수·진보 등 아무런 내용이 없는 항목까지 포함한 것을 보았을 때 『석성읍지』가 일정한 규식에 따라 만들어진 관찬 읍지임을 보여 준다.
내용은 『여지도서』와 부분적인 차이는 있으나‚ 성씨 조‚ 인물 조 등에 전혀 변동이 없다. 호구 수는 각 마을과 면 단위로 파악하였는데, 1‚994호이다. 1759년(영조 35) 1‚911호와 1789년(정조 13) 1‚998호[『호구총수』]와 비교된다. 결수는 전답 총 1‚752결 8부 3속이다. 1759년(영조 35)의 1‚394결 41부와 비교하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전세미(田稅米)가 369석 14두로 영조 대보다 약 37석이 줄고 콩[太]이 약 33석이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여기에는 면세 결수까지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적·대동·균세·군병 등은 1785년(정조 9)을 기준으로 한 듯하다. 군병 조는 세목에서는 『여지도서』의 내용과 차이가 나지만, 경외안부(京外案付) 1‚377명은 변함이 없다. 당시 수령이 파악한 읍사실(邑事實)을 보여 주는 자료이나 고종 연간인 1871년에 편찬한 『호서읍지(湖西邑誌)』[규12176]에 실린 읍지와는 내용상 차이가 크다.
[의의와 평가]
『석성읍지』는 조선 후기 석성현의 행정·사회·경제·문화와 관련한 제반 사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조선 후기 지방사를 이해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