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437 |
---|---|
한자 | 山有花歌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민요와 무가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호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2년 12월 31일 - 산유화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호 지정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3년 3월 13일 - 산유화가 부여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부여군지』에 수록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산유화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4년 5월 17일 - 산유화가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변경 지정 |
채록지 | 귀덕리 -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귀덕리 |
성격 | 민요 |
기능 구분 | 노동요|유희요 |
형식 구분 | 선후창 |
박자 구조 | 12박[본 가사]|3박[후렴] |
가창자/시연자 | 이병호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무형유산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전하여지는 노동요이자 유희요.
[개설]
「산유화가(山有花歌)」는 넓은 지역에서 채록되고 있지만, 가사를 살펴보면 부여의 지명과 백제 고사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부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산유화가의 내용에는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의 애환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산유화가는 농사를 지으며 부르는 농요이기도 하므로, 농사일의 속도와 맞아떨어지는 장단으로 불리고 있다. 모를 심는 것에서부터 노적을 쌓는 과정까지 하나의 노래로 엮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채록/수집 상황]
산유화가는 2003년 3월 13일 부여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부여군지』에 가사가 수록되어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귀덕리에서 산유화가 전수자인 예능 보유자 이병호가 구연한 내용이 채록되었으나, 채록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구성 및 형식]
산유화가는 여덟 가지의 소리로 엮여 있다. 긴 산유화, 자진 산유화, 긴 김매는 소리, 자진 김매는 소리, 벼 바심 소리, 나부질 소리, 노적 소리, 맺음소리의 여덟 가지 소리이다. 본 마당은 모를 심고 논을 매는 등 실제 농사일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산유화가의 가사 중 10여 마디는 백제 때부터 전하여 내려온 것이고, 나머지는 이후에 첨가되었다. 가창 방식은 한 명이 농악에 맞추어 부르면 나머지 사람들이 후렴을 부르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장단의 경우, 본 가사는 12박으로 치고, 후렴은 3박으로 치는데, 본 마당 중 벼 바심 소리만 예외적으로 3박으로 친다.
[내용]
긴 산유화[첫 번째 소리]
에헤에 아아 에헤
에헤이 에헤이 에에에
어어어 어어어루
상사이 뒤여
산유화야 산유화야
궁야평 넓은 들은
논도 많고 밭도 많다
씨 뿌리고 모 옮겨서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여 보세
에 -
에헤에 아아 에헤
에헤이 에헤이 에에에
어어어 어어어루
상사이 뒤여
산유화야 산유화야
오초동남 가는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북을 둥둥 울리면서
어기야 저어 가니
원포귀범이 아니냐
아 -
에헤에 아아 에헤
에헤이 에헤이 에에에
어어어 어어어루
상사이 뒤여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런 일이 왼 말이냐
용머리를 생각하며
구룡포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화벗님
고국충성 못다헌데
아 -
(후략)
[현황]
산유화가는 일부 주민들에 의하여 부분부분 전하고 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많이 희미하여지고 있다. 충청남도에서는 부여 지역 사람들의 생각과 애환을 담고 있는 노동요로서 산유화가를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하여 1982년 12월 31일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하였다. 2022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바뀌었다. 산유화가는 충청남도 부여군의 예능 보유자 박홍남(朴弘南), 조택구(趙宅九), 김영구(金永九) 등에 의하여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산유화가는 현재 구비 전승되는 민요들 중 가장 오래된 노동요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숙종(肅宗) 때의 이사명(李師命)이 남긴 기록에서 백제 때부터 전하여 내려왔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세한 연대는 미상이나 조선 후기 윤창산(尹昶山), 이사질(李思質) 등이 남긴 일부 기록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산유화가 가사의 내용 중에 궁야평, 용머리, 구룡포, 사비강, 부소산성 등 현재까지도 부여군에 남아 있는 지명들이 등장하고, 백제 의자왕(義慈王)과 비운의 역사에 대한 백제 유민들의 회한 등이 등장하므로 부여 지역의 역사성과 생활상을 아울러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농사와 관련지어 농사에 대한 성실성을 다짐하는 등 노동요로서의 면모도 두루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