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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골의 유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2904
한자 -由來
영어음역 Haetgolui Yurae
영어의미역 Origin of Haetgol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효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인물담|지명유래담
주요 등장인물 원연
관련지명 햇골
모티프 유형 햇골이란 지명이 생긴 이유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 햇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해꼴이라고도 부르는 햇골은 처인구김량장동유방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햇골의 유래」에 나오는 원연(元埏)[1543~1597]은 임진왜란 때 용인의 김량장리에서 의병을 모집한 뒤 햇골 전투에서 승리한 공을 인정받아 연기현감이 되었다. 이후 적성현감으로 옮겨 치적을 쌓다가 정유재란 때 양주진관 병마첨절제도위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채록/수집상황]

1985년 9월 14일 용인읍 김량장리에서 정영화가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하였다.

[내용]

임진왜란 당시 용인은 왜군의 주요 공격 노선이어서, 와키자카가 이끄는 병사 3천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왜적들은 경안천 연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빽빽이 들어선 막사로 인하여 무수막(無愁幕)이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였다. 당시 금령역에 주둔한 한 무리의 왜병이 주변 마을을 약탈하며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즈음 선비 원연은 진위현에 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 듣자 곧바로 붓대를 꺾고 의병을 모집한 뒤 용인의 적을 쫓아내기 위해 한달음에 금령역으로 달려왔다. 그리하여 원연은 고림리의 이진말 쪽으로 적의 시선을 쏠리게 한 다음 일군의 의병을 이동시켜 은밀하게 지금의 햇골에 매복시켰다. 그런 다음 날쌘 기병 수십 명을 추리고, 또다른 의병을 대기시켜 방포 소리가 날 때 왜적의 후미를 들이치도록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 원연이 이끄는 날쌘 기병은 좌우도 돌아보지 않고 금령역의 적진을 돌파하고는 무수막에 자리잡은 적진 앞을 한 바퀴 돈 다음 적을 유인하여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금령에서 추격하는 적과 무수막에서 내닿는 적병의 가운데에 끼게 되자 때를 보아 지금의 햇골로 치달아 도망쳤다.

양쪽에서 달려오던 왜적이 한꺼번에 맞닥뜨려 골짜기로 들어설 즈음이었다. 갑자기 좌우 협곡에서 크게 불길이 번지면서 방포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자 달아나던 원연의 군사들이 갑자기 되돌아 내달으면서 왜적을 무찌르기 시작하였다. 좁은 골짜기의 좌우 산비탈에서는 화약과 염초가 빗발치고, 또 입구에서는 의병이 활을 쏘는 바람에 수많은 왜적이 손쓸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후로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화약골이라고 불렀는데, 혹자는 적의 햇골이 지천으로 깔렸다고 해서 햇골이라 불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원주원씨 묘비명에 나타나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화약골로 불리다 오늘날 줄임말로 햇골로 불리는 것이 확실하다. 원연은 햇골 전투의 공으로 연기군수를 제수받아 선정을 베풀었으나 훗날 정유재란 때 순국하였다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지명유래담은 지역을 불구하고 여러 곳에서 전해 온다. 특히 임진왜란과 같은 큰 사건의 경우 그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는데, 「햇골의 유래」 역시 원연이란 인물과 임진왜란이란 역사적 사건이 관련되어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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